[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얼마전 까지만 해도 서울 종로 5가 배오개 '광장시장'은 전국 최대 규모의 도소매 시장으로 위세를 떨쳤다. 시장 북서쪽으로 들어서면 건물 2층 천장에 '수입구제'라고 낯선 용어가 쓰인 팻말이 달려 있다. 서너평씩 구획별로 쪼개진 상가마다 옷가지 등 의류와 침구가 가득하다. 사람이 옷 사이에 끼여 꼬물거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서로 이마를 맞댄 상가들로 통로가 미로 같다. 한 중년 상인은 "구제상품이란 수입 중고 의류"라고 일러준다. 여기저기 낯익은 수입 브랜드도 눈에 띤다. 광장시장엔 지층의 상가를 포함, 1500여 상가가 성업중이다. 상가건물 1층으로 내려오자 점포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각종 원단, 의류 부자재, 침구류까지 의류에 관한 한 없는게 없다.
한 상회를 지켜던 60대 아저씨는 "두어번 2, 3년 나가 있던 것 빼고는 40년째 장사한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이불 등 침구류를 취급한다. 전국으로 물건을 유통할 정도로 유명한 점포였단다. 돈을 자루에 쓸어담던 시절을 늘어놓았다. 잘 벌릴 때 강남 고속터미널 등으로 두어번 장사터를 옮겼던 게 후회된다고 했다.이제는 소매 위주로 근근히 꾸려나가는 정도다. 애초에 물려받았던 것처럼 곧 아들한테 물려주고 쉴 생각이란다.
그는 "월세 받을 건물 하나랑 집 두어채 있으니 욕심 더 안 부릴거다. 이곳에서 일하며 정든 사람들이 많다. 몇 안 되는 단골 생각에 일손을 놓지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몇십만원어치 팔기도 힘들다고 푸념했다. 한참 돌다가 동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길다란 먹자골목이 나온다. 먹자골목은 광장시장 동측 남북으로 100m 가량 길게 형성돼 있다. 청계천변에서 가장 큰 먹자골목을 이룬다.
먹자골목에 다다르자 옛 추억이 떠오른다. 광장시장을 유독 좋아하던 선배 한 분이 있었다. 그는 걷기와 사색을 좋아하고, 지나친 교제를 경계하며, 결핍이나 욕망에서 생기는 감정을 자제하려고 애썼다. 좀 특이한 사람였던 건 틀림 없다. 결국 그가 나이 오십을 넘기기 전에 귀농할 때는 다들 그다운 결정이라고 했다. 그와 내가 다닌 회사는 청계광장 인근에 자리해 있었다.
그는 종종 점심시간에 나를 끌고 청계천을 걸어 광장시장에 이르러 밥을 먹곤 했다. 시장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무척이나 달가워했다. 그는 '광장시장 마약김밥 마니아'이기도 했다. 마약김밥 10개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보기와는 달리 한번 먹어보면 정말 중독되는 음식이다. 김에 단무지와 당근만 넣고 가늘게 말은 다음 통깨가 올려진 김밥을 겨자소스에 찍어먹으면 그만이다. 빈대떡, 족발과 더불어 광장시장 3종세트다. 오고가며 우리는 참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는 특히 청계천 문화해설사를 능가할 정도로 주변 역사를 훤히 꿰고 있어 얘기를 듣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가 처음 들려준 얘기는 의적 임꺽정이다. 조선 명종 때의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다. 임꺽정은 양반과 부패한 관리를 털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임꺽정은 간혹 한양 도성으로 숨어들어 북촌이나 서촌 등 부자동네를 털거나 시전이 즐비한 종로 일대에서 장물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관군의 추격이라도 당할라치면 항상 배오개 인근에서 귀신같이 사라졌다.
백성의 민심을 산 도적이다보니 배오개 사람들이 그가 나타나도 신고를 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날마다 허탕친다는게 말이 안될 노릇이었다. 알고보니 임꺽정은 종로에서 배오개로 숨어들어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 성곽 오간수문(지금의 두타 일대)을 통해 수문 뒷편 갓바치마을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배오개는 이현(梨峴)에서 비롯됐는 말도 있고 산적이 들끓어 "백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는 고개"가 있다해서 배오개로 불렸다는 말도 있다.
조선 중엽 이후 육의전인 시전이 있었던 종로의 변두리인 배오개 일대에는 전란과 기근으로 도성에 몰려든 난민들이 채소를 길거리에 늘어놓고 팔았다. 특혜를 받고, 관료와 결탁된 시전과는 달리 모두 노점상이었다. 금난전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아 곧 거대한 상권이 만들어졌다. 당시 한양 도성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의정부와 육조가 있던 광화문 거리. 그 오른쪽은 양반관료들이 모여사는 북촌, 왼쪽은 신흥상인세력 등 부자들의 동네인 서촌이 형성돼 있었다.
육의전 즉 시전은 종로의 동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종로 외곽인 배오개 직전에서 끝난다. 배오개에는 채소시장이, 무교동 일대는 과일 시장이, 남대문 일대에는 어물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이들은 늘 시전 상인들의 견제를 받거나 횡포를 당하기도 했고, 일부는 시전에 중개인 노릇을 하기도 했다. 시장은 육의전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그들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배오개 난전들은 근교에서 반입된 채소를 팔던데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유통망을 형성해갔다. 여럿이 합자해 생산지에 가서 상품을 모조리 매입, 노점상에서 도매상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자본을 축적, 금난전권을 가진 시전을 대항할 정도로 커지면서 배오개는 거대한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배오개 상인들의 '도고' 형태는 당시 조선사회가 자본주의 맹아기를 진입하고 있었음을 설명해주는 단서다. 이들은 시전의 영향력을 깨부수는 세력으로 등장, 상공업과 유통, 물류를 촉진하는 신흥자본가로 부상했다.
이런 배오개시장은 일제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바로 한국 최초의 사설 상설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1904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남대문시장, 진고개(명동)으로 밀려드는 일본 상인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김종한 외 3인의 발기인이 토지와 현금 십 만원으로 광장회사를 발족시켰다.
광장회사는 종로 4가에서 6가에 걸쳐 시장을 조성했으며, 100여년간 광장시장을 지켜오고 있다. 광장은 청계천 '광교에서 장교까지'를 줄인 말이다. 이후 광장의 장(長) 자는 장(藏)으로 바뀌었다. 광장(廣藏)은 '넓은 곳집'을 의미한다. 광장시장은 1950년대까지 농수산물을 주류 취급했으며 명실상부한 서울의 곳간 노릇을 했다. 한국전쟁 후 잿더미에 돌아온 상인들은 천막을 치고 헌 옷가지와 가재도구 등을 맞바꾸는 물물교환 형식으로 장사를 시작했다.구호물자나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외래품을 거래하면서 '구호물자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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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정치 깡패' 이정재가 주름잡은 무대이기도 하다. 이정재는 상가연합회를 조직, 광장시장 상점 사장으로 폭력조직을 동원,'동대문시장 황제'로 군림했다. 이정재는 광장시장을 현대식으로 정비해 지금의 시장 외형을 갖췄다. 광장시장의 전성기는 1960ㆍ1970년대다. 광장시장 일대는 '나일론 시대'를 맞아 채소시장에서 직물과 의류 전문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한두 평짜리 점포만 있어도 부자 대접을 받았다. 날마다 전국 중소 의류 상인들이 전세 버스를 타고 몰려들 정도였다. 이들로 밤낮이 없을 지경였다. 지금 청계천 마전교를 대각선으로 평화시장, 방산시장과 옆으로 동대문종합시장 등이 의류, 패션산업 중심지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다 광장시장 덕이다.
1980년대 들어 금융실명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한파를 피해가진 못 했다. 가게가 절반 이상 몰락하고, 텅비였다가 다시 채워지면서 지금 모습을 갖췄다 그러나 대형 할인마트, 백화점 등 거대 유통기업의 등장, 쇼핑의 변화 등으로 과거와는 크게 위축된 채 전통시장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광장시장은 사실상 한국 자본주의 발상지이면서 그 변천의 상징이다. 문득 퇴근길에 시장 한복판에서 동료들과 빈대떡과 막걸리 한잔 걸치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다.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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