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공약은 후퇴했고 경제민주화는 흐릿해졌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로드맵이 21일 공개됐지만, 4대 중증질환 치료비 전액지원·기초노령연금 월 20만원 지급 약속은 현실에 맞게 수정됐다.
아울러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되고, 공정거래위원회가 독점해온 전속고발권을 중소기업청 등과 나눠 경제민주화의 취지를 살렸지만, 5대 국정목표와 21개 국정전략 어디에도 '경제민주화'를 명시하진 않았다. 재계의 우려를 반영한 조치로 읽힌다.
김용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등 인수위 각 분과 간사들이 이날 오후 삼청동 인수위 공동기자회견장에서 공개한 국정과제 세부안을 보면, 당선인의 공약은 상당부분 뒷걸음질쳤다.
당선인은 4대 중증질환 치료비를 전액 지원한다고 약속하고 인수위 출범 뒤에도 이런 원칙을 확인했지만,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 같은 본인부담금은 결국 지원 대상에서 빠졌다. 최성재 인수위 고용복지분과 간사는 "4대 중증질환에 대해 필수 의료서비스를 2016년까지 단계적으로 100% 보장하기로 했지만, 본인부담금은 유지된다"고 설명했다.
인수위는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는 본래부터 지원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어서 공약을 100% 지키는 것'이라 주장하지만, 옹색한 변명이라는 비판이 많다. 당선인의 신뢰도에도 흠집이 났다.
재원 문제로 논란이 일었던 기초노령연금 역시 국가 재정을 고려해 월 20만원씩 소득 하위 70% 계층에만 지급하기로 했다. 상위 30%는 소득과 국민연금 가입기간에 따라 차등 지원한다. 대선 당시엔 노인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홍보했지만 예상대로 재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도 상당히 퇴색했다는 게 진보 진영의 평가다. 창조경제를 통한 일자리 만들기처럼 저성장의 해법을 모색한 대목은 있지만, 경제민주화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일자리 만들기 파트너인 재계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언급이 없다는 지적에 류성걸 인수위 경제 1분과 간사는 "5대 국정목표와 경제 분야 국정과제 속에 경제민주화 관련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고 답변했다. 그는 이어 "용어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서 경제 민주화와 관련있는 공약의 실천 방향, 이행 계획에 지장을 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현재 경제2분과 간사도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대기업 영향력의 남용을 막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보호하는 것"이라면서 "징벌적손해배상제를 도입해 납품가 인하에 적용하도록 하고,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을 중기청과 조달청, 감사원에 나눠 줬다"고 부연했다. 이 간사는 또 "자영업자 지원을 위해 소상공인지원공단 만들어 지원하도록 하는 등 경제민주화의 취지가 정책에 잘 반영돼 있다"고 덧붙였다.
진보진영은 인수위의 이런 설명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통합진보당 이수정 부대변인은 "경제민주화는 퇴색했고 박 당선인은 의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진보정의당 이정미 대변인도 "경제민주화가 국정 목표에서 빠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논평했다.
새 정부는 이외에 가계부채 문제를 당면과제로 보고 "25일 당선인의 취임 즉시 국민행복기금을 운영하겠다"고 약속했다. 18조원 규모로 기금을 조성해 이 재원으로 신용불량자들의 자활을 도울 계획이다.
신용회복 신청 후 승인을 받으면 빚의 절반을 탕감해주고(기초수급자 70%), 1000만원 한도 내에선 저금리 장기상환 대출로 전환해주겠다고 했다. 단 기금 조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새 정부의 기대처럼 정부 출범 즉시 기금 운용이 가능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가계부채 문제가 해외 상황과 연결되면 큰 일 저지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새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언급했다.
복지비 충당에 크게 쓰일 것이라던 지하경제, 즉 탈루되는 세금 역시 찾아내기 어려웠다고 인수위는 고백했다. 인수위는 "공약에 쓰일 재원 마련을 위한 지하경제 양성화에 대해서는 지하경제 규모가 정확하지 않아 관련 부처가 전문가 기구를 설립해 충분히 검토하고, 관련법이 필요하면 국회에서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종전에 추산했던 지하경제 규모가 정확하지 않다는 의미다.
인수위는 이와 함께 연내에 말 많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혜진 법질서·사회안전분과 간사는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은 양 기관의 의견 차가 너무 크다"면서 미결 과제로 남겼다.
박연미 기자 chang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