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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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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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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경.’
하림은 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혼자 속으로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지금 자기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여자가 혜경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혜경이 다니던 K여고와 함께 연합 문예지 <장미와 불꽃>을 만들 때였다. 마지막 원고를 마무리하고 문예반 전원이 여름 방학 때, 함께 운화사란 절이 있는 계곡으로 MT를 갔다. 계곡에는 집체만한 깨끗한 화강암 바위들이 늘려 있었다. 밥을 지어먹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골짜기로 흩어져 물놀이를 하거나 통발로 송사리잡이를 하거나 했다.

한참 물놀이를 하고나서 어쩌다보니 하림은 혜경이 단둘이 나란히 큰 바위에 앉아 있게 되었다. 푸른 여름 하늘엔 하얀 솜구름이 돛단배처럼 떠있었고, 검은 숲 속에선 매미 소리가 맴맴맴, 시끄럽게 울려나오고 있었다. 혜경은 다리를 둥둥 걷고 있었다. 둥둥 걷인 다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방금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처럼 싱싱하였고, 쾌활하였다.


그때 혜경은 <장미와 불꽃>에 ‘겨울 보헤미안’이라는 시를 한편, 하림은 ‘지금은 노래할 수 없는 것을 위하여’ 라는 제목의 수필을 한편 싣기로 되어 있었다. 계곡의 큰 바위 위에서 몸을 말리며 두 사람은 각기 서로의 시와 산문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하림은 비스듬히 바위에 누워 있었고, 혜경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선명한 여름 한낮 속 매미 소리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하림은 비스듬히 누워 혜경을 쳐다보았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혜경의 실루엣은 천사처럼 아름다워서 살짝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후 아이들은 두 사람을 마치 단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놀려대곤 하였다. 그게 첫사랑이었을까. 첫사랑 치고는 너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 버린 첫사랑이었다. 차라리 짝사랑이라고 해야 옳았을지 몰랐다. 그러는 사이 그녀 곁에 아메리칸 들소처럼 거친 양태수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 양태수는 재수생이었는데, 재수생인 주제에 폭발하는 엔진소리를 단 125cc 바이크를 타고 몰고 다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양태수의 그 투타타타타 폭발하는 오토바이 꽁무니에 혜경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배신감, 질투..... 몇날 며칠을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상태로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하림은 그녀에 대해 멸시하고 무시하는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원래 그런 애였거니, 하고. 그리고 흔히 범생이들이 그러하듯, 마치 복수라도 하듯 참고서에 코를 박았다. 그런 결과 하림은 무사히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였고, 그런 결과 양태수는 대학도 진학하지 못한 채 생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결과 그후 양태수와 결혼한 혜경의 인생 역시 순탄치 못한 열차에 오른 셈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게 그거였다.


죽어라고 공부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하림의 자기 처지란 게 겨우 논술학원 선생이었다. 그리고 양태수는 죽고, 혜경은 마치 인생을 한바퀴 돌고 거울 앞에 돌아온 누님처럼 되어 그 가을날, 자기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결혼 했어?”
혜경이 물었다.
“아니.”
하림이 대답했다.
“왜?”
혜경이 다시 물었다.
“그냥.”
하림이 다시 대답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이 낙엽을 밟는 발자국 소리만 바스락거리며 울릴 뿐이었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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