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석탄차 달리던 해발 1000m 산악지대, 지금은 낭만 트레킹 코스로···
[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차(茶)와 말을 교역하던 중국의 높고 험준한 옛길을 차마고도(茶馬古道)로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차마고도와 맞먹는 길이 있다. 풍경도 빼어나지만 그속에 서려 있는 애환이 절절한 그런 곳이다. 운탄고도(運炭古道). 강원도 정선과 태백, 영월 일대의 산악지대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길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함백산(1572m) 백운산(1426m) 두위봉(1466m) 7부 능선을 휘감는 운탄고도는 1960~70년대에 석탄을 운반하던 탄차가 다니던 길이였다. 운탄고도의 전체 길이는 100km에 가깝지만 정선에만 80km가 넘는 구간이 남아 있다. 이 길들은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로 탄차의 운행이 멈춘지 10년을 훌쩍 넘겼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그런 곳이지만 갱도를 막고 산비탈도 보수해 2~3년전부터 트레킹 코스로 거듭나고 있다.
강원도 지역에 폭설이 내린 지난 주말 운탄고도를 찾았다. 운탄고도 트레킹의 들머리는 정선 만항재다. 국내 자동차 포장 도로 중 가장 높은 해발 1330m다. 여기서부터 운탄길을 따라 화절령을 거쳐 새비재(조비치)까지 이어지는 운탄고도는 40km에 육박한다. 산행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루에 이 코스를 모두 걷기는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만항재에 섰다. 하늘을 잔뜩 뒤덮은 구름은 기어코 새하얀 눈송이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운탄고도는 해발 1000m 고원지대에 길고도 완만하게 이어진 게 특징. 만항재에서 화절령 구간은 평탄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다. 하지만 하늘과 거의 맞닿아 있어 상쾌한 공기와 뛰어난 산세와 함께 하는 길은 일품이다.
임도는 제법 넓고 노면도 순하기 그지 없다. 조림을 하거나 간벌한 나무를 싣고 차가 드나드는 길이니 산길로 치면 대로나 다름없다. 그 위에 밀가루처럼 고운 눈이 쌓여 있다. 첫눈 위로 첫 발자국을 찍는다. 한발 두발 옮길때마다 길을 낸 자국이 선명하다.
산허리를 깎아 만든 탓에 한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그러니 길을 걷는 내내 탁월한 조망이 따라온다. 산정에서나 맛볼 수 있는 백두대간 산들의 물결치는 경관을 걷는 내내 왼쪽 옆구리에 두고 간다.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능선의 윤곽만 남긴 산들이 마루금을 좁히며 다가서는데 여간 장관이 아니다.
부드러운 내리막길이 나왔다가 지루함을 단번에 날려주는 오르막 구간도 살짝 나온다. 이런 길을 따라 가면 걷는 일이 목적지에 가닿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걷는 순간' 자체를 즐기는 것임을 알게된다.
만항재를 출발한지 3시간을 훌쩍 넘겨 화절령(花折嶺ㆍ960m)에 당도했다. 눈길을 헤치고 오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더 지체됐다.
화절령은 운탄길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는 곳이다. 강원도 산골의 아낙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야생화를 꺾었다고 해서 '꽃꺽이재' 즉 '화절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름 그대로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야생화가 산길을 수놓는다.
특히 화절령구간은 정선 하이원 리조트에서 조성한 하늘길과 함께한다. 주차장과 하이원 골프장에서 출발하는 트레킹 코스는 2.8㎞(1시간)부터 10.2㎞(3시간)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져 있다.
화절령 구간에서의 백미는 도롱이 연못이다. 직경 100m에 달하는 이 웅덩이는 지하탄광이 무너지며 땅이 꺼지고 지하수가 솟아올라 생겨났다고 한다.
도롱이 연못 주변에는 아름드리 낙엽송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눈을 뒤집어 쓴 연못 위에는 밑동이 썩어 넘어진 나무들이 침잠에 빠져있다.
화절령을 나서 고갯마루에 올라 서면 장관을 연출한다. 눈 쌓인 전나무와 낙엽송, 그리고 관목들이 저마다 다른 자태로 겨울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길도, 산자락도 순백의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아무 곳에나 카메라를 대고 셔터만 누르면 그림이 완성된다.
운탄고도의 끝은 새비재(850m)다. 산세가 새가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서 조비치(鳥飛峙)라고도 불리는 고개마루다.
새비재의 으뜸 볼거리는 광활한 고랭지 배추밭이다. 하지만 눈에 덮힌 배추밭은 백색의 장관뿐이다. 새비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작은 소나무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녀'(전지현)가 '견우'(차태현)와 함께 타임캡슐을 묻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당시 영화에 등장했던 소나무는 지금도 '전지현 소나무'라 불린다.
소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굽어 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정선 최고봉인 두위봉을 비롯해 고산준봉들이 겹겹히 늘어서 있다. 한 그루 소나무와 사방을 뒤덮은 눈 그리고 검은색 윤곽만 드러낸 산들이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그 순간 걷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피부에 닿는 감촉도 얼마나 상쾌한지, 또 맑은 자연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으리라.
정선=글ㆍ사진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
◇여행메모
△가는 길=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중앙고속도로→제천 나들목→38번 국도 영월방면→정선 강원랜드→정암사→만항재순으로 간다. 당일로 운탄고도 전구간을 걷기엔 무리가 있다. 구간을 나눠서 걷는것이 좋다. 만항재→화절령→도롱이못→하이원 폭포주차장(17km)코스를 많이 걷는다. 또 곤돌라를 타고 하이원 마운틴탑까지 올라 화절령→새비재 코스(25km)는 유순한 내리막길이다. 화절령→산죽나무길→마천봉→하이원 골프장을 잇는 4시간 짜리 코스와 초보자용 2~3시간 짜리 하늘길 코스 등도 있다. 강원랜드 골프장에서 무료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도 있다. 겨울철에는 무리지만 화절령, 새비재 등은 차량으로도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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