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재범 기자]1992년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의 피해를 날선 시선을 조명한 ‘하얀전쟁’을 만든 정지영 감독에 대한 시선은 탁월했다. 거장이란 말은 아무에게나 선사하는 별호가 아니었다. 이후 1997년 ‘블랙잭’, 1998년 ‘까’를 연출하면선 대중들의 시선에서 조금 엇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후배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여러 정치적 행보에 앞장서 왔다. 그렇게 정지영이란 이름은 영화계에선 잊혀진 또 과거의 영광으로만 기억돼 왔다. 그런 그가 지난해 ‘부러진 화살’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노감독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오는 22일 개봉하는 ‘남영동1985’에선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연출력으로 관객들의 심연까지 옥죌 준비를 마쳤다.
영화 개봉 전 이 거장과 마주했다. 그 정도의 연배와 경험 때문일까. 이른바 산전수전 공중전에 우주전까지 모두 겪은 탓에 웬만한 풍파에는 끄떡도 안할 아우라를 풍겼다. 특이한 점은 얼굴에 아로 새겨진 세월의 흔적과 달리 눈빛은 20대의 그것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번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이른바 30년 내공과 결합돼 범상치 않은 안광으로 쏘아져 나오는 듯 했다.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궁금했다. 정 감독은 ‘자신감’이란 단어에 지적을 했다.
그는 “이 영화에 자신감이란 표현이 적당할까. 난 이 영화에 그 어떤 감정도 스며들기를 거부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화면 속 그대로를 관객들이 받아들이고 그 느낌 그대로 가슴 속에 가져가길 바랄 뿐이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노 감독의 말처럼 ‘남영동1985’에는 그 어떤 미장센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러닝타임의 95% 가량이 남영동 대공분실 한 장소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시간 동안 관객은 극중 주인공 김종태(박원상 분)와 함께 대공분실에 갇혀 고문을 당한다. 그 느낌이 너무 강렬했다. 관객들 개개인이 ‘잔인한 영화 리스트’를 꼽자면 아마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라고 장담할 수준이다. 고문 장면의 지독함보다 그 어떤 장치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실체가 지독했다. 궁금증은 이랬다. ‘왜 고문에 대한 얘기를 했을까’ 였다.
정 감독은 “원래 고문에 대한 얘기에 관심이 있었다. 고문 자체의 보여짐 보단 그 고문으로 인해 인간이 무너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또 감독들은 원래 금지된 것에 대한 관심이 크다. 남들이 안하는 그런 것 말이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과는 다르게 영화 속 고문 장면은 두 눈으로 보기에도 버거울 정도다. 잔인함의 강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배우들의 헐떡임이 실제 고통으로 관객들에게 전이되는 강렬함이 크다. 실제 배우들의 고통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 전체를 감독하는 정 감독 스스로가 느끼는 고통은 누구보다 컸을 것 같다.
그는 “맞다. 찍고 있는 나조차도 정말 고통스러웠다. 지금생각해보면 난 이 영화를 만들면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또 고문을 하기도 했다”면서 “어느 순간 고문을 하는 장면을 만들면서 그 것이 촬영 기간 동안에 내 일상이 돼버렸더라. 정말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다. 그래서 고문이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그 시절에 사용됐다”고 말했다.
정 감독의 그런 경험은 영화 속에서도 투영된다. 주인공 김종태가 고문으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가해자인 경찰들이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희희낙락거리는 장면이다. 마치 그들에게 고문은 고문이 아닌 업무의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정 감독은 “이렇게 생각해 봤다. 가해자라고 불리는 그들도 결국에는 피해자라고. 단지 그들은 승진을 위해 또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위해 그것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만 여겼다. 적당한 공범의식으로 뭉쳐져 해야 하는 것이 아닌 할 수 밖에 없는 무언가로 여겼던 것이다. 그들도 결국에는 피해자일 뿐이다”고 말했다.
영화로 넘어갔다. 이번 영화의 최대 피해자는 아무래도 주연배우인 박원상이 아닐까라며 농담을 건냈다. 시종일관 칠성판(고문 장치)에 누운 채 물고문, 전기고문, 고춧가루 고문 등 실제를 방불케 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주요 부위까지 노출하는 등 배우로서 선택하기 쉽지 않은 장면도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정 감독은 “‘부러진 화살’에서 함께 한 뒤 이 영화를 구상하는 데 거절 안할 배우가 누가 있을까 하다가 박원상에게 제의했다. 예상대로 거절은 안하더라”며 “사실 신뢰의 문제였다. 박원상이 그만큼 날 신뢰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봐라 이건 진짜 고문이다. 이 모든 걸 믿고 따라 줄 배우가 박원상 뿐이라고 여겼다. 당연히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아 너무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고문 가해자 이두한을 연기한 이경영에 대한 느낌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단다.
앞서 설명한 잔인함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일부 장면에선 침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심리적 압박감마저 살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15세 관람가 란다. 그런데 더 놀랄 일이 있다. 정 감독은 애당초 12세 관람가로 등급심의를 넣었다고 한다. 정 감독은 인터뷰 당시에도 등급 심의에 대해선 굉장히 아쉬워했다.
그는 “난 지금도 12세 관람가 주장에는 변함없다”면서 “성기 노출이 문제일까. 아버지랑 목욕탕 가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 장면이 야한가. 문제는 그럼 폭력성인데, 이 영화의 폭력성이 의미 없는 폭력의 나열인가. 이건 현대사의 아픔에 대한 교육적 차원에서도 봐야 할 문제다”고 힘주어 말했다.
주변에서 말하는 정 감독에 대한 시선이 녹아든 발언이었다. 일종의 정치적 행보 말이다. 좀 더 나아가면 진보적 성향에 대한 꼬집는다. 특히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의 개봉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정 감독은 “그렇게 보는 사람은 그런 눈으로 보면 된다. 내가 대꾸할 가치가 없는 시선이다”고 딱 잘라 말했다. 반면 정치적이란 말에 대해선 조금 언성을 높였다.
정 감독은 “따지고 보면 모든 영화는 다 정치적이다. 재미만을 추구하는 상업 오락 영화도 작가나 감독의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그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느냐 아니면 교묘하게 숨겨 놓느냐에 차이 아니겠나”라며 “소재가 사회의 시각에서 민감해 할 수 있는 영화이기에 정치 영화라고 하는데 영화적 장르에 정치영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가 연출한 ‘남부군’과 ‘하얀전쟁’ 그리고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묶어서 현대사 3부작이란 평을 한 영화평론가가 있다. ‘부러진 화살’ ‘남영동1985’가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진다면 다음 작품도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하다. 이른바 ‘권력의 이면 3부작’ 정도라면 어떨까.
정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것도 괜찮은 것 같다”면서 “아마도 내 후년 쯤 다음 작품이 나올 것 같다. 현재 아이템만 구상 중인데 현대사의 아픔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게 보니 권력의 이면 3부작도 가능할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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