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백종민 기자] 세계 최고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애플의 예금잔고가 무려 1213억달러(약 132조3989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없앤 주주배당을 다시 시작하고도 현금 보유고는 계속 늘고 있는 것이다. 이익은 계속 느는데 딱히 쓸 데가 없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11월3일자)에서 기업들의 사내 유보 현금이 계속 늘어 경제위기 해소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주식시장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에 포함된 기업들은 지난 6월 말 현재 현금 9000억달러를 쌓아놓고 있다. 지난해 말에 비하면 소폭 줄었지만 2008년에 비하면 40%나 많은 것이다.
유럽 기업도 금고를 꽁꽁 잠가놓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톰슨 로이터에 따르면 유럽 기업들의 현금 유보액은 2조4000억유로(약 3377조7100억원)다. 금융위기 이전인 2007년 1조유로를 조금 웃돌았던 것이 지난해 2조유로 너머 계속 불고만 있다.
일본 기업들의 유동성 자산도 2조8000억달러로 2007년 대비 75% 증가했다.
최근 시카고 대학 연구진의 조사 결과 1975~2007년 51개국에서 개인 저축액 대비 기업 저축액의 비중이 2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기업 저축이 증가한 나라들의 경우 한결같이 국내총생산(GDP)에서 근로자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5% 줄었다. 기업 보유 현금은 늘었지만 이것이 경제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투자할 곳이 없으면 배당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톰슨 로이터에 따르면 지난 10월 현재 유럽 기업들의 지난 1년간 자사주 매입 규모는 겨우 5억9000만달러다. 이는 이전 1년 28억달러의 20%를 약간 넘어선 수준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유럽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최대 38억달러에 달했다.
기업은 현금 확보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올해 세계 회사채 발행 규모는 3조달러를 돌파해 사상 최고에 이른 2009년 수준으로 근접하고 있다. 저금리 기조 속에 좀 더 높은 금리를 찾는 투자자들이 우량 회사채로 몰리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기업이 엄청난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것은 정부의 재정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부양에 나서려 해도 기업 금고로 돈이 사라져 들어가니 정책은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마크 카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는 이런 자금을 '죽은 돈(dead money)'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돈 쓸 데가 없으면 차라리 주주들에게 돌려주라”고 불만을 토했을 정도다.
기업의 현금 보유고가 날로 느는 것은 막대한 현금을 기업 인수합병(M&A)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M&A로 주가를 높일 수 있다.
투자은행 JP모건 체이스의 마크 제너 애널리스트는 “지난 18개월 사이 M&A를 발표한 기업 주가가 상승했다”며 “기업들의 현금 선호 현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백종민 기자 cinq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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