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우승은 '최고'라는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 단어다. 여기에 주역들의 드라마가 더해졌을 때 감동의 크기는 배가 된다. '2012년 대한민국 최고 클럽' 자리에 오른 포항 스틸러스의 FA컵 우승 스토리가 그렇다. 축구화를 벗을 뻔했던 MVP, 골 못 넣는 공격수가 넣은 결승골, 2전 3기만에 승리의 여신과 손잡은 감독. 축구란 스포츠가 갖는 이야기의 힘을 그대로 보여주는 우승이었다.
▲ 공익근무요원에서 FA컵 최고의 선수로
황지수. 포항 스틸러스의 캡틴이자 데뷔 10년 차 베테랑 미드필더다. 한 때 정말 잘 나갔다. 포항의 2007년 K리그 우승, 2008년 FA컵 우승 당시 그는 중원의 핵심이었다. 활약을 인정받아 태극 마크까지 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만 스물여덟이던 2009년 10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코앞에 둔 때였다. 각오를 다지던 그에게 느닷없이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입대 연기 한도를 잘못 알고 있었다. 훈련소 첫날 저녁 취침 시간. 천정을 바라보던 그에겐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란 생각뿐이었다. 포항의 ACL 우승 결과를 신문으로 접했다. 혼란을 넘어 박탈감이 들었다. '내가 다시 선수로 뛸 수 있을까'란 생각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선수로서 전성기가 됐어야 할 2년. 황지수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했다. 퇴근 뒤 챌린저스리그(전 K3리그)에서 뛸 수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지난해 말 소집해제 후 포항에 돌아왔지만 훈련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계약기간은 곧 끝나는데다 황선홍 감독 부임 후 첫 해였다. 믿음을 주지 못하면 방출될지도 모를 상황.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황 감독에게 인정받아 재계약을 맺었지만, 올 시즌의 시작은 2군이었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개막 세 경기 만에 1군 복귀전을 치렀고 이내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지난여름 팀을 떠난 신형민을 대신해 주장 완장까지 찼다.
황지수의 별명은 '황투소'. 이탈리아 미드필더 가투소와 저돌적 플레이 스타일이 닮아 붙었다. 별명답게 그는 포항 중원의 중심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덕분에 포항도 후반기 전혀 새로운 팀이 됐다. 더블 볼란테 파트너 이명주는 "지수형은 활동량이 엄청나다. 덕분에 미드필드가 탄탄해진다"라며 "부드러운 카리스마도 있다. 실수는 다독이고 용기는 불어 넣는 스타일이라 팀 전체를 하나로 만든다"이라고 얘기했다.
황지수는 MVP 수상 뒤 "선수 생활 통틀어 이런 상은 처음"이라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이어 "ACL 우승 당시 군인신분이었던 게 아쉬웠다. 내년에도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라며 결의를 다졌다.
▲ 골 못 넣던 공격수, 넣어야 할 때 넣었다
박성호의 별명은 '수비형 스트라이커'였다.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187㎝의 장신에 스피드까지 갖췄음에도 골 결정력은 유난히 떨어졌다. 안양·부산·대전을 거치며 보낸 8년 동안 37골에 머물렀다. 최전방 공격수로서 너무나도 부족한 수치. 나이는 어느덧 서른이었다.
지난겨울 황 감독의 박성호 영입 당시 포항 팬들의 시선은 고울 리 없었다. 이적료도 꽤 높았다. 그의 잠재력에 주목한 황 감독과 달리 팬들은 "박성호가 그 정도 가치가 있나"라며 볼멘소리를 던졌다. 박성호는 자존심이 상했다. 뭔가 자꾸 보여주려다 보니 컨디션은 엉망이 됐다. 개막 이후 19경기에서 골 맛을 보지 못했다. 지난여름 팀이 잠시 '제로톱' 전술을 사용하며 주전 자리도 뺏겼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보다 앞선 건 자신을 믿어준 스승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꾹 참고 축구화 끈을 동여맸다.
기회는 찾아왔다. 8월 들어 포항은 제로톱을 쓸 수 없었다. 미드필더진에 부상이 속출한데다 상대도 전략적 대응에 나섰다. 이때 황 감독은 박성호의 준비된 모습을 발견했다. 다시 그를 원톱으로 기용했다. 제자는 폭발했다. 11경기 7골 4도움을 올리며 부활을 선언했다. 더불어 포항도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FA컵 결승전은 지난 8개월이 한 경기에 그대로 응축된 경기였다. 이날 박성호는 내내 부진했다. 슈팅은 번번이 빗나갔고, 상대 수비진을 압도하지도 못했다. '에이스' 황진성마저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던 터였기에, 그가 부진하자 포항의 공격은 전체적으로 침묵했다. 모두가 승부차기를 떠올리던 연장 후반 14분. 마지막 프리킥 기회가 찾아왔다. 골문을 향해 날아든 신진호의 오른발 프리킥. 박성호는 솟구쳤다. 손을 뻗은 골키퍼와 장신 외국인 수비수보다도 한 뼘 더 높이 뛰어올랐다. 이어진 감각적인 백 헤딩슛은 상대 골망을 그대로 갈랐다. 박성호는 서포터즈 앞으로 달려가 두 손을 번쩍 올렸다.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더 이상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스틸야드의 영웅이었다.
박성호는 결승골 장면에 대해 "내가 키가 커서 백헤딩을 하면 공이 골대를 넘기기 쉬운데 하늘이 도운 것 같다"라며 웃어 보인 뒤 "골을 확인한 순간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기뻤다"라며 감격해했다. 이어 "처음엔 팬들의 야유와 실수에 주눅도 들었던 게 사실"이라며 "지금은 당당하게 포항 팬들 앞에서 뛸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지금의 상승세를 이어가겠다"라며 힘주어 말했다.
▲ '월드컵 4강'에서도 울지 않던 그의 눈물
경기 종료 휘슬. 황선홍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안경 너머 뜨거워진 눈시울. 그는 강철 수석코치, 박성호, 김광석 등 보이는 이를 모두 와락 껴안았다. 그래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10년 전 월드컵 첫 승 결승골에도, 4강이란 위업 앞에서도 울지 않았던 그였다. 그만큼 절실했고, 또 가슴 벅찬 감독 첫 우승이었다.
황 감독은 2008년 부산 아이파크 지휘봉을 잡으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신고식은 혹독했다. 첫 해 14개 팀 중 12위. 2009년과 2010년에도 부산은 6강 진출조차 실패했다. 강호에 비해 객관적 전력은 떨어졌고, 지도자로서도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단기전을 노렸다. 2009년 리그컵과 2010년 FA컵 결승에 각각 올랐지만 결과는 모두 쓴잔. 지난해 현역 시절 친정팀 포항으로 돌아왔지만 '준우승 징크스'는 여전했다. 전북에 밀려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설상가상 6강 플레이오프에선 울산 돌풍에 덜미가 잡혀 챔피언 결정전조차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감독 경력 세 번째 결승전. 황 감독은 경기 전 유독 "절실하다"란 표현을 많이 썼다. 그만큼 우승에 목이 말랐다. 모두가 포항의 우세를 예상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달랐다. 경남은 수비를 탄탄히 하면서 빠른 역습으로 포항을 괴롭혔다. 포항 선수들은 조급함에 자꾸 올라서다 적잖게 뒤 공간을 내줬다. 절체절명의 위기도 여럿 있었다. 불안해졌다. 사람인지라 '또 다시 하늘이 나를 외면하나'란 부정적 생각마저 들었다. '준우승 징크스'가 또 다시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다.
바로 그 때였다. 경기 종료 1분을 앞두고 박성호가 결승골을 터뜨렸다. 황 감독은 두 팔을 번쩍 들며 펄쩍펄쩍 뛰었다. 현역 시절 수많은 극적 골에도 그만큼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이윽고 우승 확정. 그는 수년 뒤 만에 다시 스틸야드 철창에 매달렸다. "스~틸러스!"란 응원 구호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도자 황새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거저 얻은 우승 트로피가 아니다. 황지수가 MVP를, 박성호가 결승골을 넣었다는 점은 지도자 황선홍의 성장을 상징한다. 한 때 선수 생명의 위기까지 느꼈던 베테랑을 주장으로, 모두가 의심하던 공격수를 최전방에 세웠다. 그럼에도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믿고 기다렸다. 제자들은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첫 우승 소감부터 스승에게 돌렸다. 황지수는 "내게 신뢰와 기회를 주셨던 황 감독님께 첫 우승 트로피를 선물 드려서 기쁘다"라고 말했다. 박성호 역시 "올 시즌 초반에 워낙 부진했기에 조금씩 감독님께 빚진 걸 갚아나가는 중"이라며 "오늘도 끝까지 교체하지 않고 믿어주셔서 결승골을 넣을 수 있었다"라며 감사해했다.
황 감독은 "처음이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첫 우승을 일궈내 기쁘다"라고 말한 뒤 "선수들을 기다릴 줄 알고 조급함을 버린 것이 지도자로서 나아진 점"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 부족한 게 많은 감독"이라며 "이제 첫 걸음이다. 앞으로 100보, 1000보 더 전진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더불어 FA컵 우승으로 출전권을 얻은 내년 ACL에서의 선전도 함께 약속했다. 감독 황선홍과 새로운 스틸러스의 성공 시대는 이제 겨우 막을 올렸다. 이들이 써내려갈 또 다른 역전 스토리는 포항 축구의 감동을 약속한다.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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