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흥순 기자]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의 쾌거. 여운은 여전하다. 상대가 '숙명의 라이벌' 일본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각오로 임했던 한판. 2-0 완승은 철저한 준비와 행운이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홍명보 전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이 9일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특강에서 당시의 숨은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치밀한 분석과 노력, J리그의 경험이 가져온 행운, 온 국민이 주목했던 김기희의 교체 투입 비화까지. 귀가 번쩍 뜨일만한 얘기들이 한 가득이다.
▲사령탑의 대결, 눈싸움에서 이미 승리를 예감했다
런던올림픽을 2개월 앞둔 지난 5월. 홍 감독은 일본을 찾았다. 주목적은 J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의 몸 상태 점검. 그곳에서 의외의 성과가 찾아왔다. 생각지도 않았던 세키즈카 다카시 일본 올림픽대표팀 감독과의 저녁식사가 마련된 것.
"당시 우리는 멕시코, 스위스, 가봉 등 올림픽 본선에서 만날 팀에 대해 나름대로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다카시 감독을 만나 정보를 공유하자고 제안했다. 일본 축구는 전력 분석에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 난처해하는 다카시 감독에게 '한국과 일본은 결승에서나 만날 수 있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가. 걱정 말고 내용을 공유하자'고 설득했다. 일본의 전술과 본선 첫 상대인 멕시코에 대한 비디오 자료 등을 얻어낼 수 있었다. 실제 우리 팀이 준 자료는 별로 없다. 공교롭게도 한·일전을 앞두고 엘리베이터에서 다카시 감독과 마주쳤다. 근심어린 표정의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한국과 만났다. 지난번 만남에서 오간 얘기는 없던 일로 하고 싶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때 이미 승리를 예감했다."
▲일본 무대 경험, 제대로 통했다
'지일(知日)'은 홍명보 감독의 또 다른 힘이다. 현역 시절 5시즌을 몸담은 J리그 경험 덕분이다. 그때 배운 일본어는 한·일전 승리에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준다.
"다카시 감독이 경기 중에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는데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일본 벤치 쪽으로 이동해 작전 내용을 엿듣기 위해서였다. 측면 공격수와 수비진 쪽으로 공을 몰아주라는 내용이었다. 전반전을 마치고 라커룸에서 측면 수비수 오재석과 윤석영에게 적극적인 '샌드위치 마크'를 주문했고 결과는 주효했다. 일본에서 생활한 경험이 가장 중요한 순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김기희 교체 출전, 밤새도록 고민했다
일본전을 앞둔 홍명보 감독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한 차례도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한 김기희 때문이었다. 메달에 걸린 병역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1분이라도 출전 시간을 부여해야 한다. 절체절명의 승부. 교체 시점을 저울질하는 홍 감독의 고심은 밤늦도록 계속됐다.
"한·일전을 앞두고 경기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김기희의 교체 투입 여부에 정말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숙소에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1-0으로 이기고 있으면 넣어야 하나. 2-0이면 안정적일까. 만약 무승부로 흘러가면 추가 시간에 투입해야 하나. 교체를 준비하고 있다가 경기가 끝나버리면 어떡하나. 부모님도 지켜보고 있는데 비난과 원망을 어떻게 감수해야 할까...'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3-0 스코어였다. 스스로 체면을 걸었다. 2-0으로 앞선 상황, 김보경의 슈팅이 골키퍼 손을 맞고 골문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됐다고 확신했다. 바로 김기희를 준비시키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공이 골대를 맞고 나왔다. '아니다 잠시 대기해라.' 노심초사 상황을 지켜보다가 결국 7~8분 정도를 남기고 교체를 준비시켰다."
"사실 올림픽을 앞두고 코칭스태프에게 3~4명 정도는 경기에 뛰지 못할 수도 있다고 못 박았다. 병역 혜택이라는 명분 때문에 전체적인 팀 분위기를 그르칠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골키퍼 이범영이다. 정성룡의 부상이 아니었다면 출전 기회는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3실점 한 뒤 우리가 경기를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3,4위전을 준비한다는 비난도 곁들였다.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김기희를 조기에 투입시켰을 것이다. 병역 혜택을 위해 선수를 바꾼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새벽까지 응원해준 국민들에게 한 골이라도 따라붙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선수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했던 이유다.
김흥순 기자 s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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