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회사 이사에서 골프 티칭프로 새 삶 이광희씨
[아시아경제 황준호 기자] "그것은 소리없이 찾아와 송두리채 앗아간다. 더이상 안주거리가 아니었다. 현실은 생각보다 시렸다. 나의 근간이 사라져 아파하는 사이, 가족들은 멀어졌다. 늘 곁에 있지만 내 마음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점차 차가워졌다. 은퇴는 그렇게 갑작스레 찾아왔다. 골프가 없었다면 난 지금도 산 시체처럼 삶의 언저리를 맴돌았을 것이다."
◆은퇴, 소리없이 찾아와 아픔만 남기고= 69세의 노장 골퍼의 설명은 담담했다. 이광희 교수는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은퇴에 걸렸을 때는 '돌아온 탕아'에 불과했다. 하지만 탕아를 받아주는 예수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양상선에서 27년을 지내고 스위스계 해운회사에서 이사까지 지낸 그였다. 해운 영업에 있어서는 달인이었다. 못 먹는 술을 마시고 연일 이어지는 해외 출장을 이겨내며 살아왔다. 그가 임원이 될 정도로 회사에 헌신하는 동안 그의 간은 몇 번을 굳었다 풀어졌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했지만 그에게 은퇴는 오뉴월 감기처럼 느닷없이 닥쳤다.
"후배들을 잘 챙기는 멋진 부장으로 살아오다 임원까지 올랐다. 하지만 임원은 좀 달라야 했다. 사주에게 손도 비벼가면서 회사의 이익 창출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IMF 외환위기가 닥치고 회사가 어려워지는 와중에서도 직원들을 생각했다. 그게 발단이었고 은퇴의 시발점이었다. 하지만 난 통보를 받을 때까지 알지도 예측도 하지 못했다."
은퇴 후 3달여간 집에서 앓았다. 은퇴의 증상은 다양했다. 의욕 저하, 식욕 감퇴, 건강 악화 등 다양한 증상으로 찾아왔다.
"발가벗겨진 채 3달을 지냈다. 이름 뒤 두 글자가 사라진 것이지만 사실 나는 무장 해제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족들과 얘기도 많이 하고 친구들도 만났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숨 쉬는 것 자체가 버거워질 정도로 가라앉았다."
◆친구와의 재회=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한 방송사에서 실시한 아마추어 골프대회에 우연찮은 기회에 참가하게 됐다. 아내에게 겨우 허락을 얻어 제주도로 향했다.
골프는 그가 삶을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 친구였다. 고된 직장생활에 한 번의 간경화 판정에 두 번의 위기를 맞았다. 간 때문에 승진도 누락됐다. 이에 1982년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수도권 인근 골프장을 찾아 두 시간씩 필드를 누볐다. 공을 쳤기 때문인지 그만큼 많이 걸어서 인지 모른다. 그의 간은 더이상 굳지 않았다. 오히려 생기를 내기 시작해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해외 영업을 하면서 오대양 육대주에 있는 웬만한 골프장은 다 다녔다. 일부러 찾아다녔다. 골프가 찾아준 그의 목숨을 골프와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은퇴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골프채를 잡지 못한 그였다.
1900년대 마지막해의 12월, 차가운 제주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무념무상의 샷을 휘두른 한 최고령 골퍼가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이씨는 "아무런 욕심 없이 오랜만에 골프를 치는데 너무 즐거웠다"며 "당시 7가지 도전 코스가 있었는데 모두 내가 우승했다"고 말했다. 이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뭔지 모를 뿌듯함과 삶의 의지가 샘솟았다"고 강조했다.
은퇴라는 감기는 그렇게 이씨에 밀려 떠났다. IMF에 따른 첫 대량 명퇴 세대 중 하나였던 그는 골프를 통해 제 2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골프강사에서 교수로의 변신= 이후 그는 이날 대회에서 알게 된 한 기자의 권유로 골프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2~3개씩 썼다. 한 골프 회원권 회사에도 '칼럼을 쓰겠다'고 자진해서 연락해 칼럼을 쏟아냈다.
골프 칼럼리스트로 고정 펜도 생겼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골프 실력을 검증하고 싶었다. 2002년 그는 미국 PGTCA가 한국에서 레슨프로를 선발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해 15위의 성적으로 입상했다.
"당시 합격을 했는데 200만원을 더 내서 교육을 받으라고 했다. 장삿속이겠거니 하고 가지 않으려 했다. 내 은퇴 이후 장사를 시작한 아내에게 손 벌리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갔다 오라고 했다. 참 고마웠다.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는데 20년 구력의 내 골프도 헛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나라는 골프 기술을 가르치지만 그곳에서 나는 골프를 배웠다."
교육을 마친 다음날 미금역에 위치한 주상복합아파트내 한 주민스포츠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음날부터 그곳에 출근해 4년반 동안 1만번 가량 골프 레슨을 했다. 월급 180만원에 개인 레슨까지하면 한 달에 250만원은 벌었다. 이후 충남 천안의 나사렛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골프 겸임교수로 자리를 옮겨 많은 이들을 골프의 세계로 안내했다. 2008년부터 1년여간은 경기도 의왕시 백운초등학교에서 골프 강사로 활동했다.
이 씨는 "'선생님 그렇게 다 가르쳐주면 안돼요'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내놓았다"며 "'내가 앞으로 얼마나 골프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골프 기술'이 아닌 진정한 '골프'에 대해 아낌없이 가르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은퇴 반드시 준비하라= 그의 제2 골프인생은 아직 진행형이다. 그의 제2 골프인생은 아직 진행형이다. 미국 LA에 가 있는 딸을 보러 가는 겸 해서 아틀란타로 향해 '티칭프로 아카데미'도 수료했다. 골프 칼럼도 그의 카페인 바른 골프문화운동본부 까칠골프카페(http://cafe.naver.com/kkachilgolf/629) 등을 통해 십수년째 쓰고 있다.
그간 책도 세 권이나 냈다. '골프사랑 20년', '골프사랑 30년'에 이어 지난달에는 그의 골프 철학과 레슨 필살기를 담은 '오른손으로 왼쪽 무릎을 쳐라'라는 책도 발간했다.
하지만 이씨는 '은퇴'는 소리없이 찾아온다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40~50대에게 경고했다.
"나는 행운아다. 우연찮은 기회에 살 길을 찾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행운이 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내 사위들도 중년이다. 그들에게 한가지 권고하는 게 있다면 '공부하라'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은퇴를 맞닥뜨릴지 알 수 없다. 준비가 필요하다. 내일 혹은 다음주가 아니라 바로 오늘, 이날부터 해야 한다. 취미생활이든 그간 꿈꿨던 자격증이든, 뭐든 좋다. 그렇게 해야 남은 인생을 더욱 값지게 살아낼 수 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바로 컴퓨터를 켜고 칼럼을 적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일흔이 다 되가는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팔뚝은 힘줄이 꿈틀댔다. 그의 심장이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기 때문일 것이라는 건, 비단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으로 느껴졌다.
황준호 기자 rep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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