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리더십 키워드 3- 정조
성리할자 반발에도 북학 수용
열린마음으로 '탕평의 정치'
당파근절 왕도정치 실현위해
'조선 신도시' 화성건설계획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침전에 이 같이 적힌 편액을 달아놓았다. 이는 '탕평의 정치' 또는 '성왕의 정치'로 요약되는 정조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그대로 드러내는 문구다. 그는 이를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면서 나의 영원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언급했다. 샛별이 북극성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처럼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왕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로 정조가 말하는 성왕의 정치다.
정조는 영조가 죽고 2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의 희생이 된 것처럼, 정조 또한 세손일 때부터 붕당 간 대립구도 속에서 갖은 위험과 어려움을 견뎌냈다. 즉위 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문화정치, 열린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일종의 공포정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국정을 장악했다.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은 물론 후에 그의 최측근인 점을 이용해 세도정치를 펼쳤던 홍국영도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의 백성관은 '군민론'으로 요약된다. 그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이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정조는 민의 소리를 듣는 것을 곧 국정의 출발점으로 여겼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이는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실제 정조는 백성과 임금 사이를 막는 사대부를 피해 직접 민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재위 3년째에는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를 철폐해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정조가 능행(陵行)할 때 가능했는데 정조실록과 일성록 등에 실린 상언·격쟁만도 5000건이 넘는다 한다.
백성을 중시한 정조의 리더십은 종종 세종과 비교대상이 된다.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했다는 점과 학식이 깊었다는 점 등도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정조 또한 세종과 마찬가지로 월 5회 이상 신하들과 경연을 펼쳤고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신하들에게 권위를 행사했다.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어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등 젊은 학자들과 밤새 학문과 정책에 관한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초계문신제를 만들어 36세 이하 젊은 신하들 중 능력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4서3경을 읽히고 시험을 보게 했다. 단지 시험을 보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칭찬과 꾸지람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직접 시험문제도 냈다. 또한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리면, 한자나 올바른 표현 등에 대해 지적하며 다시 돌려주곤 했다. 경연에서도 박학다식함으로 신하들을 압도했다. 세종이 원로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인사권으로 권위를 확보했다면, 정조는 확신 없이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만큼 원로들의 권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확보했다.
정조는 카리스마형 리더로 꼽힌다. 아버지인 태종이 정적들을 이미 다 제거했던 세종과 달리 정조는 붕당 간 대립구도가 격심한 시기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모두 없애기보다 일부 남겨두는 불완전한 승리 체제를 유지했다. 강경 일변도의 정책이 오히려 반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알았던 셈이다. 홍상범은 죽이되 홍낙임은 처단하지 않았고 김귀주는 죽여도 배후인 정순왕후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반대파인 노론 벽파에 대한 강한 경고인 동시 정조와 그의 측근이 늘 경계태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게 한 효과가 있었다.
또한 정조는 열린 정치를 추구한 왕으로도 불린다. 당시는 성리학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거세게 일어났던 시기다. 북학과 서학(천주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정조는 전통 성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 신하들을 마다치 않았다.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는 데 열린 자세를 보인 것이다. 박지원의 제자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북학파 인물들을 대거 기용했고 천주교 인재들도 받아들였다. 중인 신분도 다수 있었으나 정조는 능력에 따라 직책을 부여했다. 이 가운데 문물의 발전과 혁신의 결과물이 나오게 됐음은 물론이다.
개혁과 통합을 외쳤던 왕 정조. 그가 추진한 개혁은 화성 건설로 집약된다.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이 성은 과학적인 성으로도 평가된다. 정조는 이 곳을 자신이 추진했던 모든 개혁의 무대로 삼고자 했다. 축성기술을 도입해 성을 쌓고 이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코자 했다. 국영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선진농법을 적용하려 했다.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한 통공정책은 물론이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으로 이 프로젝트는 미완에 그쳤다.
반면 정조가 즉위 초반 노론 벽파를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만들고자 한 점은 '통합의 리더십'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당시 노론 벽파는 70여년간 일당 전제를 통해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하지만 정조는 점진적으로 세력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지 않고 노론 벽파를 공개적으로 배척함으로써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결국 노론 벽파의 단결을 돕는 역할을 했다. 개혁의 대표주자로 꼽히지만 개혁의 속도에 대한 완급 조절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시대가 요구하고 국익을 위한 결단이라 하더라도 타 세력과의 타협과 공감 형성을 거치지 못하면 결국 개혁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개혁 이전 충분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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