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그림살롱 107회 | 서양화가 현지영 ‘선물’시리즈
소낙비 지나간 어스름 저녁. 맹꽁이 울어대는 집 앞 논둑에 친구랑 나란히 앉아 별 총총 밤하늘 보았었지. …어린것은 무릎에 잠들고 창밖을 바라보니 까닭 없이 반달이 빙긋 웃네!
하늘색 물망초 꽃이 긴 머릿결에 다가와 단아한 향기를 물들였다. 아롱아롱 흩날리는 꽃잎. 안개 헤치며 눈부신 햇살이 강물을 적시면 물색 꽃들은 하나 둘 핑크빛으로 스몄다. 신열(身熱)로 창백해진지 며칠. 어질하여 쉬이 못 일어나 노심초사인 때, 흙 담벼락 아래 키 큰 카사블랑카 백합이 기꺼이 등을 빌려줬다. 꽃등에 얹혀 너무나 황홀해하는 소녀. 어디로 갔는지, 병마가 사라졌다.
목이긴 초식동물이 안개 피어난 들길을 머뭇하다 조용히 다가와 순하게 스친다. 상큼한 냉기의 투명하고 풋풋한 초록 숲 기운이 깊은 호흡으로 이끌었다. 자귀나무 가지에 둥지를 튼 새들이 나무의 열매가 콩처럼 잘 자란다며 일러줬다. 그리고 포르르 날아가며 ‘홍색 꽃은 또 얼마나 예쁜 걸요’라며 힐끗 쳐다보았다. 밤비 내린다. 서로가 짝을 이룬 길쭉한 잎들. 비를 막으며 오가는 깊은 눈길. 여린 꽃잎들이 순백헌신으로 젖은 슬픔을 위로했다. “얼굴이 타서 하얗게/부서지는 파도를 닮은/이빨만 하얗게 해변에 부려놓은 소녀야 아홉 살 열 살 소녀야/올해도 숭어가 무지하게 띈다”<이윤학 詩, 남당리 소녀>
편지, 꽃의 화답
또 하루. 아침 산책로엔 은근하면서도 상큼한 자극적 향기가 숲길 가득 피어올랐다. 천사같이 하얗고 샘물처럼 맑고 선명한 연두색 꽃술의 카사블랑카 백합들이 한꺼번에 만발했다. ‘가늘고 긴 꽃대에서 이렇게 크고 탐스러운 여러 꽃송이를 피워 내다니. 놀라울 따름이야. ’가벼운 독백, 경쾌한 산보를 즐길 때 꽃이 소식을 전해왔다. ‘종종 꽃송이의 균형에 대한 관심을 지나칠 때가 많죠.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꽃이 피는 건 완벽한 중심을 의미해요. 사랑이라는 것. 꽃과 다름없다는 것. 마음의 친애(親愛)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당당해서 더욱 아름다운 답신이었다. 하얀 꽃종이, 매끄러운 잉크의 펜을 들고 ‘실은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무척 호감이 갔었죠’라고 쓰려다 ‘맞아요. 꽃이 되고 싶죠. 당신처럼’이라고 적었다. 바람은 일다 넘어갔다, 다시 부풀었다. 그러다 휙휙 소리 내어 불면 풀들은 군무(群舞)하듯 물결치고 대지는 웅대한 울림으로 뭇 생명들을 껴안았다. 빨간 우체통이 겸연쩍게 홀로 두리번거린다. 화답이 도착했나 보다.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장석남 詩, 옛 노트에서>
권동철 문화전문 기자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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