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면 몇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읽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다시 생각을 정리해서 쓸 만한 것들을 골라낸다. 그 중 가장 즐거운 과정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다. 무언가를 접하면서 떠오르는 다양한 상상들을 추론과 증명을 통해 하나의 관점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보상과 같다. ‘10 클립’은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클립으로 메모를 보관하듯, 가볍고 편하게.
<추적자>, 재벌 손자가 청와대보다 더 좋아하는 것
“청와대 가지말자 엄마. 준호가 그러던데 청와대 가면 놀이동산도 못 가고 야구장도 못 가고.” SBS <추적자>에서 이 말을 한 아이는 대선 후보 강동윤(김상중)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재벌 총수 서 회장(박근형)이고. 얘네 할아버지 집은 청와대보다 더 좋을 게다. 검찰총장도 밤에 전화 한 통으로 부릴 수 있는 할아버지 아닌가. 서 회장 집안에서 청와대에 가고 싶은 건 이발소집 아들로 태어나 서 회장의 “마름”노릇을 해온 강동윤뿐이다. 한국에서 자수성가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은 대통령이다. 그리고 재벌은 그 위에 있다. 10년 전이라면 공감을 얻지 못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추적자>는 대중이 인식하는 권력의 현실을 스토리 안에서 쉽게 섞어내는 재주를 가졌다. 재벌 손자가 가고 싶은 곳이 하필이면 야구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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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닝맨’ 어드벤처
SBS <일요일이 좋다>의 ‘런닝맨’은 마치 그 옛날 <원숭이 섬의 비밀> 같은 어드벤처 게임을 생각나게 한다. 캐릭터, 미션, 아이템이 있고, 아이템은 퀴즈나 게임을 통해 얻는다. 무엇보다 제작진이 철저하게 상황을 통제하는 세계다. 출연진이 미션 수행도중 어떤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만나도 미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게임의 배경이고, 제작진이 참여를 허락한 사람만이 그들이 요구한 만큼의 역할을 수행한다. 제작진은 거의 모든 상황을 시나리오대로 끌고 가는 대신, 예측 불가능의 재미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만큼 비슷한 시나리오가 반복되면 식상해질 수 있고, 제작진은 끊임없이 그들의 세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서 3회에 걸쳐 아이유, 정대세, 리오 퍼디낸드, 박지성 등이 출연하고, 수많은 게임을 넣은 ‘박지성 특집’은 ‘런닝맨’의 방식으로 도달한 어떤 정점이었다. 한계를 돌파하려다보니 스케일은 더 커지고, 게임은 더 치밀해졌다. ‘런닝맨’은 매번 그들의 세계를 진화시켜야 시청자를 만족시키는 고난을 겪지만,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그 점에서 ‘런닝맨’은 언제 지칠까 걱정 되지만, 어디까지 달릴지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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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진>의 밀도=죽는 사람/러닝타임-송승헌의 내레이션
MBC <닥터 진> 5회 타임라인
09분- 진혁(송승헌), 괴질에 걸린 어린 고종 완치.
10분- 홍영휘(진이한)가 괴질 환자들이 모인 곳에 몰래 보낸 쌀 도착.
13분- 진혁 괴질 걸림.
47분- 진혁 완치.
54분- 포도청 군관들, 괴질 환자 모인 곳에 방화.
<닥터 진>이 한 번 보면 멈추기 어려운 이유. 너무 빠르니까. 하지만 캐릭터의 감정에 몰입하기 어려운 이유. 너무 빠르니까. 덕분에 초반에 시선을 모으기는 쉬웠다. 하지만 드라마 후반은 캐릭터의 감정선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닥터 진>의 제작진은 캐릭터의 감정을 어떻게 납득시킬까. 극적인 상황마다 나오는 진혁의 독백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작진의 선택일 것이다. 5회에서도 진혁은 독백을 통해 냉정한 의사에서 환자의 목숨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의사로 변했음을 설명한다. 목소리의 톤은 내레이션처럼 착 가라앉았고, 감성적인 음악이 흐른다. 그러나 이런 내레이션에 가까운 독백은 주인공의 감정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기는 어렵다. 환자의 죽음 앞에 감정을 설명하는 진혁보다 차라리 말없이 오열하는 진혁을 보여주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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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말고 춤춰, Like this
원더걸스의 신곡 ‘Like this’는 그들의 노래 중 가장 실용적이다. 후렴구는 ‘Like this’라는 짧은 멜로디만을 반복하고, 그에 맞춰 ‘개다리춤’을 연상시키는 안무를 반복 강조한다. 뮤직비디오와 방송무대 모두 많은 사람들이 원더걸스의 춤을 함께 즐기는 콘셉트인 건 제목 그대로 ‘Like this’, 원더걸스처럼 춤과 노래를 따라하라는 메시지를 극단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Tell me’조차도 후렴구에는 ‘Tell me’의 반복 뒤에 ‘나를 사랑한다고’처럼 감정을 끌어올리는 멜로디가 붙었다. ‘Like this’는 그조차 없이 오직 ‘Like this’, 이 멜로디만을 변주, 반복한다. 이 노래의 성패는 최소한의 장식조차 없이 즐거운 느낌만을 강조하는 이 짧은 멜로디와 안무가 지금 대중이 원하는 것이냐에서 결정될 것이다. 원더걸스는 그들이 지금까지 쌓은 모든 것과 그 아우라를 내려놓은 채, 그들이 가장 잘했던 단 한 가지 무기로 한국 대중에게 다시 다가선다. 따라하고, 즐기라고. ‘Tell me’를 불렀던 그 때처럼. 원더걸스는 다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인다. 그러나, 가장 용감해 보인다. 그 용기만큼의 소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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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강명석 기자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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