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파워女星⑦]강신숙 본부장, 규정집·고객노트 끼고 사는 'Mrs.디테일'

시계아이콘읽는 시간4분 11초
뉴스듣기 글자크기


[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리 천장'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여성 임원 1세대'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 1980년대 입사한 신입 공채들이 '별'을 달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풍(女風) 시대'의 개막이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드리엔 멘델은 <유능한 여자는 많은데 왜 성공한 여자는 없을까>라는 저서에서 직장 생활에는 여자가 모르는 불문율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멘델은 유능한 여성은 많은데 성공하는 여성이 적은 이유로 "여성이 목표지향적인 남성 사회의 룰을 모른 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관계지향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비즈니스라는 게임에서 이기려면 유능한 척, 강한 척하고 재미가 없어도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필요하면 싸우고, 팀의 일원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최근 사회분위기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채로 입사해 조직에서 '별'을 다는 여성임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임원 1세대라는 점에서 이들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말 그대로 유리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신호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 조직에서 오랜 시간 몸담으며 남성과 당당히 경쟁해 살아남고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여성(女星)들. 유리 천장을 과감히 깨트린 여성 임원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은 어떠할까.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그녀들의 인생 스토리. 20~30대 새내기 여성 직장인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한민국 여성 임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전한다.<편집자주>

커피타고 복사하고 19살 신입때부터 규정집열공
변두리 오금동 지점서 8개월 '실적 1위'는 경영노트의 힘
수협 40주년때 40살 연예인 다 제치고 회사 광고 모델로 발탁
과로로 터진 실핏줄은 내 자랑스런 훈장이다

입사 후 얼마 동안은 이름이 없었다. 다들 '강양'이라 불렀다. 커피를 타거나 복사 심부름을 하고, 가끔 창구에서 공과금을 받는 게 전부인 생활이 이어졌다. 긴 생머리는 은행원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짧게 자르라는 상사의 단발령에 남모르게 눈물도 흘렸다.

그러나 회사는 '은행원'의 꿈을 이뤄준 곳이었다. 신입사원 '강양'은 상사의 방석을 직접 세탁해 주름 없이 다려뒀고, 기쁜 마음으로 화병에 꽃을 꽂았다.


30여년의 시간이 지나 강양은 이제 나이 지긋한 남자 지점장들 사이, 한 가운데에 앉아있다. 회의에 늦는 지점장에게는 불호령을 내리는 철의 여인이 됐다. 짧지 않은 시간, 치열한 담금질은 코스모스 같던 신입사원을 금융회사의 별로 키웠다.


강신숙 수협은행 강북지역금융본부장의 젊은 시절은 그 자체로 '수협'의 역사다.


1979년 입사 후 강 본부장도, 수협도 변했다. 강 본부장 입사 당시 단 한 명도 없던 여성부장은 이제 3명으로, 부장급 간부사원의 20% 비중이다. 수협이 보수적인 색채를 지워가고 있는 그 중심에 강 본부장이 있다.


◆경쟁력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 "메라비언의 법칙을 아시나요?"


강 본부장이 기자에게 대뜸 한 질문이다. 다행히 대강 알고있던 내용이었다. '메라비언의 법칙'이란 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과 청각이 93%, 말의 내용이 7%를 차지한다는 미국 심리학자 앨버트 메라비언의 연구결과다.


그는 이 '메라비언의 법칙'을 후배들에게 버릇처럼 강조한다. 대화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지만, 대화 주체끼리 주고받는 표정과 말투는 그 역량에 따라 움직이며 수준과 질(質)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타입의 고객과 상담일정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복장을 준비해야죠. 전문지식과 능력은 기본원칙이고, 경쟁력은 디테일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건 여성들이 남성 대비 우월한 분야예요. 고객 개인에게 맞춘 표정과 말투를 구사한다는 것은 금융서비스업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마흔이 넘어서면 자기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죠. 그 나이쯤 되면 게으른 사람은 외모에 게으름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내 첫인상이 조직의 첫인상이라는 것, 뻔한 얘기지만 치열하게 고민할 문제예요."


실제로 강 본부장은 고객과의 만남에서 얻은 크고 작은 정보들을 '고객관리노트'로 만들었다. 고향이나 취미, 투자성향 등 직접 상담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이후 이 노트는 은행의 CS강의, 고객관계관리(CRM구축) 등에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디테일'은 말 그대로 '기본' 이후의 것이다. 초년병 시절 강본부장은 '기본'을 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입사해 이 자리까지. 스스로 가시밭 길이라 표현하는 그 과정에서 아쉬움이 짙었을 터다.


"입사 후 '걸어다니는 규정집'이라고 불렸어요. 야근 후에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호프집에서 친구들 만날 때도 수협의 금융상품이나 각종 규정, 원칙, 협동조합법이 적힌 규정집을 손에 달고 다녔죠. 어린 나이에 입사했고 전라북도 순창 두메산골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일하는 만큼, 뒤쳐지지 않겠다는 오기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전국 2등. '걸어다니는 규정집'의 3급 전환고시 성적이다. 이후 2001년 1급 승진, 2005년 부장승진, 2009년 서울중부기업금융센터장에 이어 2011년 지금의 강북지역금융본부장 자리까지 올랐다. 매번 '여성 최초'의 기록을 갈아치웠음은 물론이다. 노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한 데 이어, 지난해 8월 연세대학원 정치행정학 석사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오금동의 기적 넘어, 수협의 얼굴 되다 = 강 본부장이 주인공인 '오금동 지점의 기적' 일화는 수협 내부에서도 유명하다.


지난 2001년 그가 발령받았을 때만 해도 오금동 지점은 수협의 천덕꾸러기 지점이었다. 실적 부진으로 폐쇄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불과 10개월만에 상황은 역전됐다.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그곳은 실적 1위의 주력 지점으로 환골탈태했다.


강 본부장은 165억원에 불과하던 수신고를 314억원으로 끌어올렸다. 담보보다는 고객의 신용을 철저히 분석하는 방법으로 연체율을 낮추면서 총여신을 62억원에서 3.5배가 넘는 220억원으로 늘렸다. 그와 오금동 지점은 2001년 부임부터 2년동안 8분기 연속 실적 1위를 기록했다.


실적이 쉽게 쌓인것은 아니다. 못 마시는 술과 매일 씨름해야 했고, 주말도 없다시피일했다. 직원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경영노트'를 작성토록 했다. 직원 개개인이 주인의식을 가져야만 조직과의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강제적인 목표설정이 아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기 위해 내부 소통에도 신경을 썼다. 안팎으로 뛰다보니 스트레스에 원형탈모가 생겼고, 주사바늘을 달고 살 정도의 피곤이 따라 붙었다.


오금동 지점장 2년 차던 2002년, 강 본부장은 '수협의 얼굴'이 되기도 했다. 당시 수협은 설립 4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이미지 광고를 계획중이었고, 연예인을 비롯한 모델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내부인재, 즉 '수협인'을 모델로 쓰자는 데 중지를 모았다. 그리고 그 주인공으로 강 본부장을 발탁했다. 강 본부장은 당시 나이 마흔살로 수협과 '동갑'이었고, 실적으로 전국 1위를 하고 있었다. '메라비언의 법칙'을 거울삼아 항상 단정한 외모를 유지해오던 노력도 발탁의 배경이 됐다.


이후 새 터가 된 서초동 지점장 자리는 출발부터 숨이 턱 막혔다. 오금동에서 2년여간 이어온 '실적 1위' 자리, '수협의 얼굴'이라는 자존심을 지켜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서초동 지점은 기업금융 수요가 많은 기업형 지점. 이제껏 주로 개인고객이나 혼합형에서 영업을 해온 그에게 쉽게 다가올 리 만무했다. 그러나 여성 지점장들에게 주로 개인고객을 주로 상대하는 이른바 '아파트형 지점'만 배정하던 당시 관행을 깨기 위해서라도, 기업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했다.


꼬박 1달이 걸렸다. 특정 기업을 타깃으로 삼아서 업무제안서를 제출하고 니즈를 발굴하며 맞춤형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강 본부장의 눈은 항상 붉었다. 터진 실핏줄 때문이었다.


"실핏줄 터진 눈은 저에게 훈장이었어요. 수익창출을 고민하고, 서초동 거리를 배회하며 힘들어서 울기도 했죠. 이제야 생각이 나는데, 올해 1월에도 실핏줄이 터졌습니다. 본부장 2년차에 이렇게 바쁘고 열심히 일한다는 얘기니까…. 자랑스러운 몸의 변화죠."


◆술 마시고 늦게오는 엄마를 이해시키는 방법 = 강 본부장은 지난 2000년 전국 금융인 가운데 7명을 뽑는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이 사실은 스스로도 굉장한 자랑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만큼은 떳떳한 부모가 되기 힘들었다. 욕심이 많은 강 본부장에게 육아는 눈물이 나올 만큼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오금동 지점장 시절엔 고객을 찾아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출근했다. 취기가 올라 집에 가는 날이면 아이들에게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해시키고 싶었다. 엄마가 밖에서 당당하게 일하고 겨루고 있고, 항상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길 바랐다. 답은 하나였다. '일 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래서 강 본부장은 주말 근무 때 마다 아이들을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엄마가 어디 가서 놀고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이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거야. 엄마는 신지식금융인이야." 그제서야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고, 아이들도 서서히 엄마의 빈 자리에서 '자랑스러운 금융인'을 발견해 나갔다.


강 본부장은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다. 뭔가를 배운다기 보다는 '긍정적 몰입'을 하기 위해서다. 잊을 때 쯤 되면 '삼국지'를 꺼내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즐길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마음을 다진다.


책으로 풀기 어려운 난관이 찾아오면, 김희정 새누리당 의원을 찾아간다. 지난해 연세대학원에서 공부할 당시 교수와 학생으로 연을 맺었다. 김 의원은 "권위적이기 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고, 자신부터 변하라"는 원칙을 항상 강조하지만 영업 전선에서 전문성과 도덕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강 본부장에게 현실적인 직언으로 길을 터주는 인생의 멘토다.


◆현장에서 쏟아진 스카웃 제의 마다한 이유는 = 뭐든 '안전'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금융권에 강 본부장처럼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스타일의 여성임원은 흔하지 않다. '담백하고 쿨하게' 마음 속 얘기들을 꺼내 보여준다. 타 은행 임원의 계좌까지 유치할 정도로 친화력이 좋다.


그래서 어딜가든 눈에 띈다. 지점 영업 시절 스카웃 제의를 수없이 받은 이유도 그때문이다. 1998년 과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한 중견 제화업체로부터 영입 의뢰를 받았다. 수협과 거래하던 해당 업체 사장의 직접 캐스팅이었다. "이정도 열정과 마케팅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었다"며 그를 강하게 붙잡았다. 지점장 시절에는 한 시중은행에서 제의가 있었다. "강 지점장 같은 분이 오면 은행에 좋은 변화들이 많을 것 같다"며 설득했다.


그러나 강 본부장은 수협 자리를 끝까지 고수했다. 19살에 입문해, 은행원의 꿈을 이뤄준 고향 같은 곳이라는 개인적인 이유 뿐 아니라 대한민국 1차 산업을 지켜주는 '정(情)의 문화'가 있는 곳이라는 까닭에서다. 일반 시중은행과는 다른, 강 본부장을 절대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잘 모르는 감정일수도 있지만, 전 회사에 참 감사해요. '대리만 돼도 감지덕지겠다'며 입사했던 저를 어느새 본부장 자리까지 밀어 올려 줬으니까요. 수협은 작지만 강한 은행입니다. 저를 키워 준 만큼 저도 후배들을 위해서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할 겁니다. 가끔 이런 제 마음을 후배들이 알아주는 것 같아서 행복해요."


강 본부장이 자랑스럽게 내민 휴대폰에는 후배 직원에게 온 문자가 저장돼 있었다. 마치 회사와 조직에 대한 강 본부장의 고백처럼 느껴졌다. '본부장님, 사랑합니다.'


김현정 기자 alphag@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김현정 기자 alphag@
<ⓒ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newsva.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