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아내의 자격>의 중심 이야기는 분명 윤서래(김희애)와 김태오(이성재)의 로맨스였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건, 대단한 속물이자 진상인 서래의 남편 한상진 역을 맡은 배우 장현성이었다. 방송국 여자 후배의 팔뚝에 손가락으로 글씨 쓰는 시늉을 하거나, 국회의원 앞에서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면서도 동료들에겐 으스대는 그의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징글징글했다. 이전에도 장현성은 늘 연기 잘 하는 배우였지만, 디테일에 강한 그의 연기는 단편적인 이미지보다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자체가 중요한 한상진 역을 맡아 비로소 만개했다.
지난 5월 4일부터 시작한 연극 <노이즈 오프>는 그의 진가를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극중극 ‘빈집 대소동’을 무사히 무대에 올려야 하는 상황. 그러나 배우들은 하나같이 우왕좌왕하고, 백스테이지를 엉망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결국 작품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이 정신 없는 소동극의 구심점은 바로 장현성이 맡은 연출가 역이다. 냉철하고 때론 히스테리컬한 듯하지만, 조연출과 여배우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그의 뻔뻔함은 약 3시간에 이르는 연극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양념이다. 연극 무대와 스크린, 브라운관 어디서든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고야 마는 배우, 장현성을 만났다. 그는 여전히 발각되지 않은 여러 개의 얼굴을 품고 있어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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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LOGO#> 오랜만에 연극을 하는 입장에서 연극 무대 이야기를 담은 <노이즈 오프>는 더욱 특별한 작품일 것 같다.
장현성: 5년 전쯤 동숭아트홀 소극장에서 <라이프 인 더 씨어터>라는 2인극을 한 적이 있다. 그건 배우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사라져 가는가를 담은 다소 서정적인 작품이었다. <노이즈 오프>는 엄청난 소동극이지만 연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부분에선 이 작품만한 게 없는 것 같다.
<#10LOGO#> 무대 앞과 뒤의 상황이 맞물리면서 웃음이 유발되기 때문에 배우들 간의 합이 굉장히 중요할 텐데.
장현성: 공연을 하다 보면 객석에서 웃다가 뒤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웃음) 두 달가량 연습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생긴 애드리브들을 정리해서 공연에 많이 반영했다. 이것 외에 공연에서는 함부로 애드리브를 하지 않는다. 굉장히 정교하게 짜여있는 대본이기 때문에, 연습을 시작하고 4주 정도 지난 후에야 나도 ‘아, 이 연극이 정확히 이렇게 짜였구나’라고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문을 여닫는 순서나 물건을 놓는 위치, 그에 따른 리액션 등 연극 연습치고는 시험공부 하듯이 해야 한다.
“맡은 역할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10LOGO#> 실제 극단 생활을 해봐서 잘 알겠지만 작품에서처럼 배우들 간의 관계나 백스테이지의 상황 등 공연 외적인 요소가 무대에 영향을 끼치는 일들이 있을 것 같다.
장현성: 틀림없이 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다 보면 배우들끼리 대부분 아는 사이니까 누구 형이 어제 공연에서 어떤 실수를 했대, 이런 소식들이 다 날아온다. 가령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 설정이니까 배우가 무대에 제때 등장하지 않으면 나중에 들어온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큐를 놓치면 지하철 문을 억지로 비집거나 팍 뛰어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공연하다가 뛰쳐나가는 사람들, 분장실에 앉아 있다가 큐를 놓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웃음) 물론 <노이즈 오프> 내용처럼 배우들의 연애사가 공연에 영향을 끼치는 일도 있었다.
<#10LOGO#> 한 마디로 배우들이 공연을 어떻게 망치느냐를 보여주는 건데 (웃음) 연출가의 심정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 같기도 하다.
장현성: 일단 20년 가까이 연극 연출가들과 같이 지내다시피 했고, 대학에서 연출 공부도 했으니까 연출가라는 역할 자체가 아주 쉽게 다가온 부분이 있다. 지금 이 극단은 내일 밤에 정상적으로 공연을 올리는 게 목적인데, 어떤 배우는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거 미안한데, 나 동기가 없으면 못 움직이겠어. 잠깐 심리적인 동기를 주면 안 될까?” 이러고 있으니 연출가의 답답함이 훨씬 더 크게 와 닿는다. 실제로도 그런 배우들이 있다.
<#10LOGO#> 하지만 배우로서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동기라는 게 정말 중요하다. 본인은 맡은 역할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결하나.
장현성: 거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의문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고 그 시간이 다 합쳐지면 한 인물이 완성된다. 어찌 됐든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해결해야지, 어영부영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이번 작품도 연출가라는 사람을 ‘대학로 연출가 중 누구 정도’라고 분명하게 설정하고 시작했다. 같이 일하는 조연출을 꼬셔서 임신시키고, 연기는 못 하는데 예쁜 여배우를 어디서 하나 데려와서 또 꼬시는 걸 보면 그렇게까지 훌륭한 연출가는 아닐 거다. 하지만 연습할 시간이 2주밖에 남지 않은 극단에서 급하게 끌어오는 연출이라면 아예 엉터리는 아닌 거지.
<#10LOGO#> 디테일한 설정까지 생각하는 건데, JTBC <아내의 자격> 속 한상진을 연기할 때는 어느 정도로 연구한 건가. 사소한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이 사람이 속물이란 걸 보여줬다.
장현성: 한상진이라는 사람이 유난히 문제가 있어서 의학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 케이스냐, 나는 아니라고 봤다. 한국 남자들의 반 이상이 한상진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한상진이 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속물적이기 때문에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뿐이지 누구나 다 그런 욕망은 있으니까. 도덕적인 교육을 받고 아이를 키우면서 주위의 눈도 의식하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거다. 결국 그 욕망을 꺼내어 놓고 싶은 충동이 어떻게 발생하는가가 중요한데, 한상진은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서 공격성이 튀어나온 거지. 현실에서 한상진 같은 사람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의 교양인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었을 거다.
<#10LOGO#> 보편적인 특성을 잡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자라는 직업과 한상진만의 특징을 좀 더 파고드는 작업도 필요했을 텐데.
장현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봤다. 어디까지 배웠나, 이 사람의 인문학적인 정서는 어디까지인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이해하는가, 셰익스피어를 알고 있는가. 신문은 한겨레신문을 보나 조선일보를 보나, 웹사이트 중 가장 많이 접속하는 곳은 어디일까. 한상진은 실제로 따지면 유명 일간지 기자 정도일 거다. 그것만으로도 한국사회에서는 성공한 남자로 보일 테니까, 만약 10명의 동료가 있다면 한 3명 정도는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몰고 다니면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걸 좋아하고, 빈틈이 생기면 요만한 권력을 이용해서 여자들한테 치근덕거리기도 하는 거다.
“<아내의 자격>은 안판석 감독님의 힘이 컸던 것 같다”
<#10LOGO#> 늘 그런 방식으로 역할에 대한 감을 잡는 편인가.
장현성: 취재를 할 때는 해당 공간에 직접 들어간다. 강력반 형사 역할을 맡았을 땐 진짜 형사들과 같이 조직폭력배도 잡으러 가 봤다. 피가 정말 시냇물처럼 철철 흐르더라. 흉부외과 의사 역할을 맡았을 땐 짧게는 7시간, 길게는 13시간씩 걸리는 수술을 일곱 케이스 정도 참관했다. 그렇게 공간 자체의 특성이나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심리, 신체적인 상태에서 일하는가를 중요하게 본다. 그 외에는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고려한다. 친구들과 열 번 술을 마시면 몇 번 돈을 내나, 국어와 사회를 좋아했을까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을까. 그러다 보면 버릇도 생각하게 되는데 손을 많이 쓰는 외과의사라면 손을 계속 보호한다든가, 형사라면 아픈 상처가 떠오를 때 눈을 깜빡깜빡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을 조금씩 모아서 버릴 것들은 버리고 최대공약수를 만든다.
<#10LOGO#> 그렇게 연기해온 결과 <아내의 자격>에서 장현성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가장 강하게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장현성: 사실 어떤 이미지를 어떻게 남기느냐 그런 건 잘 모른다. 시키면 하는 거다. (웃음) 연극은 배우 예술, 영화는 감독 예술, 드라마는 작가 예술이라고들 하는데 <아내의 자격>은 안판석 감독님의 힘이 컸던 것 같다. 감독님은 배우들이 백퍼센트 감정을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려고 노력하셨다. 예를 들어 윤서래가 바람이 나서 한상진과 대판 싸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대본으로 치면 4, 5장 정도다. 굉장히 길고, 감정의 그래프로 치면 1부터 100까지가 왔다갔다 해서 배우로서도 너무 너무 지치는 장면이다. 그걸 연극하듯 딱 한 테이크 찍었는데, 감독님이 “어, 좋은데요? 더 안 찍어도 되겠는데?” 그러시더라. 필요 없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데 집착하지 않는 분이다. 어떤 장면에선 배우의 뒤통수도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다.
<#10LOGO#> 그렇지만 항상 본인에게 좋은 작품만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나.
장현성: 나는 이미 늙으신 어머니와 두 아들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기 때문에 그 의무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를 선택할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진 못한다. 정말로 하기 싫은 작품이라면 안 해도 되지만 어느 정도는 감수하는 편이다. 대신 연극은 하고 싶은 것만 한다.
<#10LOGO#> KBS <승승장구>에서 “주연을 맡은 작품들이 평단에서는 극찬을 받고 흥행은 참패했다”는 말을 했는데,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에서의 고민은 없나.
장현성: 예를 들어 이런 거다. <마법사들>이라는 영화를 찍었을 때, 부산에 무대 인사를 갔는데 관객이 17명 들어왔다. 그날 상영을 마치고 관객들과 같이 바닷가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영화 이야기를 했다. <마법사들>이 산업적으로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일으키진 못했지만, 나와 그 17명 사이에는 잊지 못할 추억이 생긴 거다. 내가 이런 작품들을 하느라고 일상이 무너진다거나, 식구들이 배를 곯고 자녀가 학교에 못 가는 게 아니므로 이 정도 선을 유지하면서 가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10LOGO#>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 긍정적인 성격 덕분일까.
장현성: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내가 낙천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중학교 때부터 죽는 게 무서워서 잠을 못 잤을 정도다. 지금도 죽음이 언제 어떤 식으로 나를 덮칠지 모르기 때문에 일상이 늘 두렵다. 죽음 앞에 서 있을 때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들? 글쎄, 죽기 전 1, 2분이라도 정신이 좀 있으면 그런 게 스르륵 스쳐 지나간다고들 하지만 병리학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그런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것 같다. 저쪽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안타깝지 않으려면 내가 깨어 있는 시간을 함께 있는 사람들과 신나게 보내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내 시간이 무의미하게 사용되는 게 아깝다.
“자연인 장현성의 삶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더 큰 고민”
<#10LOGO#> 어쨌든 시간은 한정적이고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도 있을 텐데 조바심은 나지 않나. 극단 <학전>에서 함께 활동했던 황정민, 설경구 등이 먼저 잘 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장현성: 조바심을 낸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설경구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윌 스미스라고 고민이 없을까? 다 고민 덩어리일 거다. 오히려 나는 자연인 장현성의 삶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더 큰 고민거리다. 우리나라 인구가 한 5천만 정도 되는데 삶의 질로 따진다면 난 그 중 선택받은 사람이다. 좋은 차가 있고, 대출금을 갚아야 하긴 하지만 예쁜 집도 있다. 아이들이 있고, 집 근처에 아이들과 같이 놀러 갈 수 있는 공원과 예쁜 산도 있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작품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이렇게 좋은 멤버들과 공연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 이것만큼 축복받은 삶이 없다.
<#10LOGO#> MBC <놀러와>에 나왔을 때는 정말 진지하게 ‘해결의 책’에게 “내가 배우로서의 방향성과 속도를 제대로 가지고 가고 있느냐”라고 물어보지 않았었나.
장현성: 속도라는 건 빨리 천만 관객을 끄는 배우가 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장현성이라는 배우를 생각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을 갖고 싶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하철 1호선>을 떠올리니까. 조바심이라기보다는 그냥 욕심이랄까.
<#10LOGO#> 그러기 위해선 지금까지 주로 맡았던 엘리트적인 역할과는 완전히 다른 역할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장현성: 가령 게이바에서 일하다가 가정으로 돌아와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범하게 지내는 역할 같은 걸 해보고 싶다. 나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을까 하는 이들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굉장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를 보면 첫 장면에서 카메라가 평화로운 전원주택의 풍경들을 쭉 비추다가, 침실로 들어가서 남편이 부인을 옆에 둔 채 자위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만큼 사실은 누구나 다 드러내기 쉽지 않은 욕망과 아픔들이 있다는 거다. 사람들이 문을 닫아놓고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것들을 열어서 ‘야, 봐. 이게 너야’라고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10LOGO#>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 SBS <유령>과 KBS <빅>에서도 그런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장현성: <유령>에서 맡은 역은 냉혈한인 사이버수사대 국장이다. 수사대 팀장인 김우현(소지섭)과 사사건건 부딪힌다. 나는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거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든가 하는 역할을 많이 맡는 편인데, 이번에도 강한 반전이 있는 인물이다. <빅>에서는 귀여운 악당 같은 역할이다. 아예 대놓고 코미디는 아니고 봤을 때 ‘도대체 저 사람 뭐지?’ 하는 느낌이랄까. 콧수염까지 달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한 번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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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황효진 기자 seventeen@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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