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조선미창' 물류업의 새벽을 열다
82년 된 대한통운 출발은 일제때 '쌀배달 특급'
1차대전 후 쌀폭동 경험한 일본
값싸고 질좋은 한국쌀 비축
만주전쟁으로 군량미 수요 급증
조선미창 보유창고 33만㎡ 넘어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이 쓴 저서에서 수시로 '로마군이 병참에서 이긴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곧 로마군이 각종 전쟁과 전투에서 승리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보급에 있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로마군이 '물류' 면에서 상대적으로 앞섰기 때문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공명 역시 다르지 않았다. 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수많은 전쟁과 전투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다름 아닌 병참이었다. 넓은 영토를 가진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였던 촉나라는 군량미와 마초까지도 고려한 그의 용의주도한 병참으로 이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우리나라의 기업경영에서 물류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였다. 당시만 해도 해당 관련 업계를 제외하고는 물류에 대한 중요성이나 인식조차 희박한 상태였다.
1975년 대우중공업과 한국중공업에서 지게차를 생산하고 운반과 하역 부문의 기계화 보급이 맞물리면서 비로소 물류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80년대 초 태평양화학과 동아제약, 한국타이어 등이 조직 내에 잇따라 상품유통본부 혹은 물류과를 신설하면서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물류가 전연 생소한 것만은 아니었다. 물류란 아주 오래 전 상업의 시작과 함께 이미 운용돼온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우선 조선시대의 미곡 유통 시스템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엔 미곡이 백성의 생활과 국가 재정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는 재화였다. 이 때문에 태조가 새 왕조를 건국하자마자 가장 먼저 착수한 경제 정책이 토지제도의 개혁과 조운제도의 복구였다. 조운(漕運)은 세수로 징수한 미곡을 선박 등을 이용해 한양으로 운송하는 제도를 뜻한다. 조운에는 바닷길을 이용하는 해운과 강물을 이용하는 강운, 그리고 육로를 이용하는 육운이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조운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도성의 인구가 늘어나 소비 시장으로서의 규모가 형성되고 화폐가 통용되자 시장을 통한 미곡 유통이 활성화된 것이다. 이때부터 시장에 의한 민간 부문의 유통량이 관 주도 유통량을 앞지르며 미곡 유통을 지배하게 되면서 조선의 미곡 유통시스템은 경쟁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쟁 체제는 미곡 유통의 진화 발전으로 선순환되지 못한 채 이를 지배한 경강상인들에 의한 담합과 매점·매석으로 쌀값 조작이라는 역기능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들은 그간 축적된 자금 동원력은 물론이고 선상을 통한 전국의 쌀값 정보를 누구보다 빠르게 얻었다. 또 운송수단인 선박을 독점하고 대형 창고까지 보유해 쌀을 장기간 매점할 수 있었다. 결국 쌀의 구입과 판매량, 판매시기, 판매지역 등을 조절해 독점적 이익을 취하면서 끝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1883년에 발생한 이른바 '쌀 폭동'이었다. 이 사건은 마포의 경강상인 김재순 등이 인위적으로 도성 안의 쌀값을 폭등시켜 분노한 한성의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같은 쌀 폭동은 20세기 들어서도 반복됐다. 일제 강점기인 1918년 여름, 경성의 종로소학교 앞에 마련된 쌀 판매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주민과 일본 경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동안 가벼운 몸싸움으로 끝나는가 싶던 충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험악해져 급기야 쌀값 폭등에 항의하는 조선인들의 폭동으로 번져나갔다.
폭동이 있기 한 달여 전쯤 일본 도야마현의 한 어촌에서 주부들이 쌀 도매상을 습격해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이른바 '쌀 소동'이라 일컬은 소요 사태가 일본 전역으로 번져나가면서 한때 계엄선포를 준비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에 조선과 일본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쌀 폭동은 가장 많은 생산품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던 쌀의 대규모 이동이 당시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쌀 폭동이 진정된 후 일본은 근본적인 식량 자원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 결과 일본과 조선에서 수리사업, 품질 개량, 퇴비 활용, 농사 기법 등 대대적인 미곡 증산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1차 세계대전 이후 마땅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유휴 자본을 투입해 조선을 장기적인 식량기지로 개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증산된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문제가 불거졌다. 조선과 동시에 추진된 일본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미곡 생산량이 점차 증가하는 가운데 조선에서 쌀이 대거 유입되자 그만 쌀값이 큰 폭으로 곤두박질치고 만 것이다.
전국적인 쌀 폭동으로 이미 곤욕을 치른 바 있던 일본 정부는 부랴부랴 조선에서 유입되는 쌀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대책 수립에 나섰으나 품질 좋고 저렴한 조선 쌀의 경쟁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다시금 대책이 수립됐다. 일본으로 들어오는 조선 쌀의 수량을 월별로 일정하게 조절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조선 쌀의 수출량을 차질 없이 보관 통제할 수 있는 별도의 수단이 마련돼야 했다.
그렇게 확정된 안이 '조선미곡창고계획'이었다. 이어 창고 건설과 창고에 위탁된 쌀을 동양척식과 조선식산은행에서 저리의 자금을 대출한다는 계획이 확정되자 미곡 창고 건설이 빠르게 진척돼 1930년 한 해에만 전국 16개 지역에 17만석을 수용할 수 있는 미곡창고가 세워졌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쌀을 보관할 수 있는 상업창고의 건설과 이를 관리할 전담 회사를 설립하는 문제였다. 곧바로 일본은 전담 회사의 운영 방안에 대한 윤곽을 제시했다. 설립 회사는 쌀 수출이 많은 5개 항구에 1만6529㎡(5000평) 규모의 창고를 신축 또는 임대 방식으로 확보해 건설비와 운영비 등은 국고에서 보조한다는 내용이었다.
계획안이 발표되자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동양척식, 조선정미회사 등 법인과 개인 주주를 포함한 28명의 발기인이 새 회사의 정관 작성을 비롯해 세부 운영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1930년 11월15일 경성의 남대문통에 자리한 경성전기 빌딩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자본금 100만원(지금 돈 약 1200억원)의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조선미창)'가 탄생했다. 오늘날 대한통운의 전신인 조선미창이 조선 물류업계의 원조를 이루면서 그 창립일을 '물류의 날'로 제정한 이유도 여기 있다.
조선 물류의 새벽을 열게 된 조선미창은 개항장이 들어선 인천항을 시작으로 부산과 진남포, 목포와 군산 지점을 개설하면서 첫 물류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가장 많은 생산품이자 수출량 1위의 화물이었던 쌀의 매입, 운송, 입고, 보관, 출하, 선적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일괄 관장하는 국책회사로 출범한 조선미창은 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물류 전문회사로 도전을 거듭해나가게 된다.
특히 조선미창(이하 미창)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빠른 속도로 팽창할 수 있었다. 회사 설립 이듬해인 1931년 일본이 만주에서 전쟁을 일으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만주 국경을 넘나들면서 군량미의 수송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미창은 당국과 정부 소유미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정부미의 일관 보관 및 이송 업무를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북방 진출이 날로 확대되면서 군수물자의 보관과 수송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조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933년에는 조선군사령부의 창고와 함께 현미 보관 및 운송에 관한 청부계약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대일 수출에만 국한됐던 미창의 업무 영역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까지 이어지는 국제 간 물류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1934년 2차 산미증식계획이 중단되면서 미창의 업무 환경은 한층 복잡해졌다. 일본이 산미증식을 중단시킨 표면상의 이유는 국제 곡물 가격 하락으로 수리조합의 경영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선 쌀의 수출 증가로 일본 농촌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각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가 서둘러 조선에서의 산미증식계획을 중지시킨 것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의 쌀 생산량은 한동안 계속 늘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대일 수출이 큰 폭으로 줄어들자 전국 각지에선 생산된 미곡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미창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회사 설립 당시만 해도 향후 5년간 필요한 창고 면적이 2만3140㎡(7000평)를 약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됐으나 1934년 미창이 보유한 창고는 이미 3배를 넘어섰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보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미창은 이듬해부터 각지에 지점을 신설하는 한편 창고 신축 및 증축과 함께 지방에 산재해 있는 농업창고를 적극적으로 매입하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미창은 1936년까지 마산과 여수, 강경, 원산, 해주에 새 지점을 개설하고 신축 창고 8만9256㎡와 임대 창고를 포함해 자그마치 23만1404㎡에 이르는 보관 능력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다시 이듬해 발발한 중일전쟁은 동북아의 경제 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갖다줬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빠른 속도로 공업화가 진행된 일본에선 상대적으로 농촌 인구가 감소하면서 농업 생산량이 눈에 띄게 저하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쌀을 비롯한 곡물 소비가 크게 늘어나면서 조선 쌀의 수입량도 다시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미창의 업무 수행에도 많은 변화를 요청했다. 일본군의 전선이 중국 본토까지 확대되면서 군량미를 포함한 군수물자의 보관 및 배급 기관으로서 미창의 업무량이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증한 것이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지배가 보다 확고해지면서 조선의 주요 항구와 철도역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륙으로 향하는 화물과 여객이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미창이 1937년부터 항만에 들어오는 화차 운송에서 창고 보관을 거쳐 선적에 이르는 작업의 전 과정을 일괄 취급하기 시작한 것도 항만의 적체가 시작된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인에게 1939년은 악몽과도 같은 한 해였다. 역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쌀 생산량이 전년도에 비해 절반가량인 무려 1000만석 가까이 줄어들자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각지의 쌀값이 급등하면서 매점매석마저 횡행했다.
조선의 대흉작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궤도 수정 또한 불가피했다. 당장 일본 군부의 전시 식량 수급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자 일본 정부는 서둘러 3차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고 그 이듬해부터 연산 3000만석을 목표로 대대적인 증산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증산 계획이 또다시 추진되면서 미창의 보관 업무 또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선이 확대되자 조선을 경유해 만주와 중국 등 전장으로 수송되는 전시 물자의 물동량도 크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미창의 영역 또한 전선을 따라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1942년 한 해에만 함흥과 평양, 청진에 새 지점을 개설했다.
1943년이 되자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했다. 철도를 통해 수송되는 전시 물자가 급증하면서 미창은 같은 해 남한 13개 역과 북한 10개 역 등 23개 역에 차급화물(화차 1량 단위로 실리는 대량화물)에 대한 면허를 받아냈다. 정부 관리 양곡의 효율적인 운송 취급을 위한 면허였으나 당시 취득한 면허는 이후 미창이 소운송 분야에도 활발하게 진출하는 출발점이 됐다. 이처럼 전시 물자의 취급량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가운데 해방 직전인 1944년 미창의 회사 보유 창고는 어느덧 사상 처음으로 33만0578㎡에 육박하고 있었다.
필자는 1960년대 후반까지 국내 7대 도시였던 남쪽의 항구 도시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건축물은 다름 아닌 미창의 미곡 창고였다. 고만고만한 시내 건물들을 보면서 지내다가 어쩌다 미창에라도 가볼라치면 그 우람한 창고 건물이며 끝없이 즐비하게 늘어선 위용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르긴 해도 미창이 들어선 다른 대도시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 미창은 이 땅에서 가장 큰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인프라를 기반으로 매우 값진 업무 경험을 축적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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