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우리나라 영문 이름 '코리아(Korea)'를 세계에 알린 건 인삼을 구매하기 위해 머나먼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상인들이었다. 100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인연 덕분인지 중동ㆍ북아프리카(MENAㆍMiddle East and North Africa)와 우리나라는 플랜트 건설로 더욱 돈독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MENA는 우리 플랜트 업계의 텃밭인 동시에 주요 고객이다. 지난해 이 지역 플랜트 사업의 최대 수주국이 바로 우리나라다. 최근 3년간 우리나라 해외 플랜트 수주액 중 중동 프로젝트 비중은 평균 55%에 달한다.
최근 이 지역 수주 분야가 다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MENA 국가들이 석유자원 이후 시대(Post-oil Era)를 대비해 신재생에너지 등 사업 영역을 다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가 프로젝트 등장이 이젠 흔한 뉴스가 됐을 정도로 규모도 매년 확대 중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해외 플랜트 수주 실적 중 5억달러 이상이 80%에 육박한다. 그만큼 MENA 지역의 플랜트 생태계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대형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던 금융 부문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고 있다. 금융기관의 유동성 규제가 강화된 바젤III가 시행되면서 국제상업은행들은 대규모 프로젝트에 대한 장기대출 자산을 축소하고 있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의 주요 참가자였던 유럽계 상업은행마저 신규 프로젝트에 대해 까다로워졌을 정도다.
이처럼 척박해진 플랜트 생태계에서 단비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게 정책금융이다. 해외 플랜트 발주처들이 입찰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금융 조달까지 요구하는 '선금융 후발주' 방식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즉, 금융조달 능력이 프로젝트 수주의 성패를 결정 짓는 관건이다. 우리 금융회사들이 역량을 확충하고는 있지만 해외 프로젝트를 지원한 경험이 부족하다. 정책금융기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최근 카타르에서 진행된 바르잔(Barzan) 가스처리 프로젝트의 경우 여러 공적수출신용기관(ECA)으로부터 조달한 금융액이 26억달러로 전체 프로젝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정책금융기관들의 금융이 플랜트 사업의 성사를 좌지우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가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민간 금융회사의 역량이 확충돼야 한다. 개별 정책금융기관이 지원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 지 오래다. 민간 금융회사가 긴 호흡을 갖고 정책금융기관과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해 경험을 쌓고 해외 발주처와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MENA 지역의 발주회사나 금융권 사람을 만나보면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그들의 문이 열림을 깨닫게 된다. 단기에 가시적 성과가 없더라도 자주 찾아가 관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수출입은행이 작년에 두 차례 이 지역을 찾아 통합 마케팅을 실시하고 지난 25일 서울에서 '수은-MENA 컨퍼런스 2012'를 개최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얼마 전 중동 지역에서 코미디언과 방송인으로 맹활약하는 한국인에 대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창한 아랍어ㆍ영어는 물론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현지에 한국을 알리는 한국관광 명예홍보대사로도 위촉돼 활약 중이다. 이처럼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뚫고 인정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현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도 MENA의 문을 열 수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오래된 친구 MENA가 다시금 손을 내밀고 있다. 우선 신뢰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정책금융은 정책금융대로, 민간금융은 민간금융대로 새로운 탑을 쌓아야 한다.
김용환 수출입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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