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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 “과거를 그리는 데 있어 거짓말하지 않으려 했다”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5분 45초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영화 속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된다는 걸 차치하더라도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영화 <건축학개론>이 환기하는 정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주석처럼 들린다. 기본적으로는 지금 이곳에서 떠올리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첫사랑이 있던 어떤 유일무이한 시기에 대한 향수가 이 영화에는 있다. 습작이라는 말 그대로 수많은 미숙함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또 그 시기이기에 가능한 실수로 기억되는 시절에 대한 향수가. 그래서 이 첫사랑 이야기는 먹먹하거나 아프기보다는, 그 시절이니 그런 거라고, 미숙했지만 그 땐 그럴 수밖에 없노라고 관객을 다독여준다.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한 이용주 감독의 작업은 그래서 영화 속 서연(한가인)의 집을 리노베이션하는 승민(엄태웅)의 그것을 닮았다.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동시에 과거의 기억을 껴안는다는 점에서. 건축과 출신으로 서른 즈음 영화로 분야를 옮기고, “30대 전부를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를 붙잡으며 보낸” 그는 과연 기억을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재구성하고 설계했을까. 그 도면에 대한 또 다른 주석이 여기에 있다.
*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LOGO#> <건축학개론>은 재회한 첫사랑에 대한 영화다. 많은 관객들의 추억을 환기할 것 같은데 쿡 건드려주고 싶은 정서가 있나.
이용주 감독
: 2003년에 초고를 쓰고 지난해까지 계속 시나리오를 붙잡고 있었는데, 어떤 포인트를 노리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쓴 것 같다. 첫사랑이었던 사람이 찾아오면 어떨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그 시절에 대한 회고 자체를 즐기며 썼다고 할까.

“엔딩에서 주인공들이 잘 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용주 감독 “과거를 그리는 데 있어 거짓말하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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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LOGO#> 그렇다면 이야기가 재밌는 게 중요했나, 스스로 아련해지는 게 중요했나.
이용주 감독
: 내가 잘 아는 감정이라 생각했고, 누구나 잘 아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건축학개론> 초고 쓸 때 초등학교 모임 갔는데 거의 20년 만에 처음 만난 친구들끼리 술 마시고 그러다 옛날 얘기가 나왔다. 예를 들어 미술시간 같은 때 조별로 책상을 붙이는데 애들이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무슨 노래를 부르며 옮기게 했었다. 그 얘길 했더니 다들 박수 치며 ‘맞아 맞아, 무슨 노래였지?’ 이랬다. 시나리오는 그런 기분으로 썼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지향적이라고 하는데 과거지향이 나쁜가? 너무 앞만 보며 살라고 강요당하는 거 같은데 이 취향이 나쁜 걸까? 여전히 내 영화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다.

<#10LOGO#> 즉 경험적으로는 다들 공유할 만한 정서지만 그게 영화로 볼만한 것이냐에 대한 것이다.
이용주 감독
: 그런 물음, 우려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첫사랑 이런 얘기가 재밌어? 밋밋해, 너무 잔잔해, 그런 얘기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명필름 전에 다른 제작사에서 준비할 땐 서연(한가인)에게 나쁜 남편이 있는 삼각관계 설정을 비롯해 별의별 설정이 다 붙었다. 그런데 영화는, 특히 멜로는 취향의 세밀한 부분까지 합의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시나리오가 초고 때부터 많이 바뀌었지만 다른 이야기로 둔갑한 건 결코 아니다. 이렇게 하면 흥행 잘 될 것이다, 하면서 이것저것 고치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밸런스 잡는 게 제일 힘들었다.


<#10LOGO#> 밸런스라면?
이용주 감독
: 중학교 생물 시간에 배운 건데 나무에 어떤 어떤 요소가 필요하면 그것들의 평균치만큼 자라는 게 아니라 가장 부족한 요소만큼만 맞춰진다고 한다. 이건 영화 만드는 것과도 비슷한 거 같다. 배우, 시나리오, 계절, 장소 등 여러 가지가 하나로 모였는데 그 중 하나만 결핍돼도 각 요소의 평균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올 거라 봤다. 변수에 대한 우려가 굉장히 많은 프로젝트였다. 설득이 안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영화니까.


<#10LOGO#> 논리적인 설득이 아닌 직관적인 공감으로 받아들이는 장르니까.
이용주 감독
: 어디 특강 가서 영화를 한 마디로 규정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취향 싸움이라고 하는데, 취향은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옳은 게 없다. 그래서 디자인이나 영화가 어려운 거다. 취향을 설득한다는 것.


<#10LOGO#> 그렇다면 시나리오를 쓰며 제작사의 요구를 비롯한 여러 변수 속에서 꼭 지키고자 했던 건 무엇인가.
이용주 감독
: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구조는 바뀐 적이 없다. 심지어 주변에서 둘의 과거가 더 재밌으니까 그쪽 위주로 쓰라고 했을 때도 그건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면 청춘물이 되고 다른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남자가 여자의 집을 짓는 것, 둘이 과거에 건축학개론 수업을 들으며 도시를 여행하는 설정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엔딩은 여러 버전으로 바뀌었는데, 사실 이들이 엔딩에서 잘 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0LOGO#>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조 속에서 과거를 아름답게 그리지만, 또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를 놓치지 않는다.
이용주 감독
: 사는 게 그렇지 않나. 옛날을 생각하면 참 정겹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하루가 정겹지 않지. (웃음) 현재는 그럴 수밖에 없고 기억은 항상 미화된다. 거기에 함몰되면 청춘물이 된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정겹기도 하지만 반성할 거, 씁쓸하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다. 거기에 있어 거짓말하지 않으려 했다.


“건축가가 건축주를 이해하는 과정이 멜로와 비슷”


이용주 감독 “과거를 그리는 데 있어 거짓말하지 않으려 했다”

<#10LOGO#> 그게 리얼리티인데, 어린 시절 승민과 서연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에서 ‘왜 첫사랑은 꼭 바보처럼 끝날까’라는 생각이 들며 공감했다.
이용주 감독
: 첫사랑만 그런가, 처음에는 다 미숙하지. 그 때는 한두 살 선배도 왜 그리 커보이는지, 왜 그리 용기가 없었는지. 그렇게 성장해나가는 거 같다. 가령 나는 어릴 때보단 화를 잘 낸다. 안 참아도 된다는 걸 배웠으니까.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 친구들이랑 옷가게에서 청바지 사러 갔는데 옷 입어봤을 때 “아, 예쁘네요” 하던 점원이 안 사겠다는 우리 말에 태도가 싹 변하면서 “빨리 벗어요”라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아직도 왜 그 때 화를 안 냈지 싶다. (웃음) 지금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 땐 순진했구나. 마찬가지로 어른이 된 승민은 능글능글해지고, 서연은 까칠해지는 것일 테고.


<#10LOGO#> 그것도 일종의 성장일까.
이용주 감독
: 어릴 적 승민이 서연에게 모진 말을 하고 돌아선 건 자기가 상처 입을까봐 남에게 생채기를 입히고 도망친 건데, 누구나 극한 상황에 닥치면 그럴 거다. 그런 상황을 피할 줄 아는 요령이 능글능글함이 아닐까. 자기가 비겁했다는 걸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작업이니까 성장이라 할 수 있겠지.


<#10LOGO#> 그 깐족거리던 남자가 회상 신에선 순진한 건축과 1학년이기에 느껴지는 호기심이 있다.
이용주 감독
: 개인적으로는 승민과 서연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걸으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약속에 대해 “너 그랬어”, “안 그랬어” 하는 신을 쓰며 떨렸다. 서연은 희미한 기억으로 승민이 그렇게 말했노라 생각하고, 승민은 기억나는데 안 나는 척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데, 그 때 둘은 파르르 떨리지 않았을까. 현재만 보면 평범한 이야기인데 과거를 다녀오면 현재의 공기가 변하는, 그런 걸 궁리하며 썼다.


<#10LOGO#> 그래서 곧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승민이 그래도 서연의 집을 완공하겠다며 “내가 끝낼게. 그렇게 하게 해줘”라 말하는 모습이 다양한 의미로 읽힌다.
이용주 감독
: 일로서의 책임감도 있다. 디자인이란 건 시나리오와 비슷하게 자기 새끼 같다. 하다가 남에게 맡기는 건 슬픈 일이다. 또 건축가는 건축주가 뭘 좋아하는지, 이 방이 몇 개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얘기를 나눠야 하기 때문에 건축주를 이해하게 되는 면이 있고. 그 과정이 멜로와 비슷한 게 있지.


<#10LOGO#> 미완으로 끝난 첫사랑을 매조지하는 느낌도 들었다.
이용주 감독
: 무언가를 대입해 말하는 건 싫지만, 승민은 옛날에 서연의 집을 짓다 만 거 아닌가. 그걸 완성하는 거라고 본다.


<#10LOGO#> 그래서 승민이 서연의 집을 짓는 과정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제주도를 생각했나.
이용주 감독
: 명필름에서 제의했다.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제주도는 풍광이 좋고 집값이 싸다. 또 명필름에서 그 집을 자산으로 남겨 활용할 계획이 있고. 나는 반대할 계획이 하나도 없었지. 시나리오 상 서울 아닌 지방 소도시면 됐으니까.


<#10LOGO#> 왜 서울이 아니어야 했나.
이용주 감독
: 서연의 고향으로 가는 게 중요했다. 서연을 지방 출신으로 잡은 게, 강북 사는 사람은 강남 사는 사람 불편해하고, 강남 사는 사람은 강북 친구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은 특별한 설정 값이 없으니까 불편함 없이 그 분위기를 흡수한다. 너무 강남 사람 같은데 알고 보면 순천 출신인 경우 있지 않나. 서울 토박이에 한군데서 오랫동안 정착해 살던 승민은 더 먼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계속 정착하지 못하던 서연은 이제 정착을 꿈꾸는 구도라고 생각했다.


“다음 작품이 영화감독으로선 첫 작품이 될 것”


이용주 감독 “과거를 그리는 데 있어 거짓말하지 않으려 했다”


<#10LOGO#> 본인이 건축과 출신인데 제주도 집 설계에 관여를 많이 했나.
이용주 감독
: 건축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실제로 건축을 맡은 구승회 소장이 힘들어했다. 과 동기이자 20년 넘은 친구인데, 많이 짜증났을 거다.


<#10LOGO#> 건축을 아는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용주 감독
: 건축가가 제일 만나기 싫어하는 클라이언트지. 구승회 소장이 진짜 힘들었다. 두 가지 이유로 힘들었을 텐데, 첫째는 디자인이 이게 뭐냐고 구박한 게 있고 (웃음) 또 하나는 내가 제약을 너무 많이 줬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 있던 집을 리노베이션하는데, 옛날 시놉시스부터 계속 지킨 건 옛날 집 외벽에 낙서 있는 부분이 내벽이 되게 하는 거다. 뭐냐면, 집의 기억을 남기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구승회 소장에게 두 면과 지붕을 남겨달라고 했고, 건축가는 나보고 뭘 하라는 거냐고 하고. 그 대사를 고스란히 시나리오에 넣었다. “왜 아무 것도 못하게 해.” 영화에서 서연이 퇴짜 놓는 디자인들은 실제로 내가 퇴짜 놓은 걸 소품으로 쓴 거다.


<#10LOGO#> 그럼 본인이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결국 기억을 남기는 건가.
이용주 감독
: 애초에 디자인 지향적인 특이한 걸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과격하고 자극적인 디자인은 정말 하기 싫었다. 멋있지만 사람이 살 수 없는 디자인. 내가 <건축학개론>을 하고 싶던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주택 설계를 하고 싶단 거였다. 건축사무소 다닐 땐 주로 오피스 위주로 디자인했는데 건축의 꽃은 주택이다. 돈은 안 되지만 정말 어려운.


<#10LOGO#> 그럼 이번 영화가 일석이조인 셈이었겠다.
이용주 감독
: 건축을 털어내는 작업이었다. 처음 건축에서 영화로 넘어갈 땐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고, <건축학개론>을 쓰면서는 더 심했다. 입봉을 준비하며 시나리오를 쓰는데 이 작품으로 건축에 대한 기억을 털고 완전한 영화인이 되어야지 했다.


<#10LOGO#> 건축은 첫사랑 같은 건가?
이용주 감독
: 그렇지. 재수를 해서 90학번인데 그 전에 시험 볼 때도 건축학과에 지원했다. 1999년에 영화로 넘어갈 생각을 했는데 1998년까진 건축 외에 내가 다른 걸 할 거라는 생각도 안 했고.


<#10LOGO#> 영화의 정서와도 밀접한데, 첫사랑 같은 학문과 함께 한 본인의 20대는 어떻게 기억되나.
이용주 감독
: 항상 여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스무 살 그 한 해. 가장 시간을 만끽했다. 연고전이 있을 때 백양로 큰 길을 막아버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기차놀이를 하는데 여자애들은 집에 전화해서 더 늦게 가면 안 되느냐고 사정하고. 다신 안 올 시간이란 걸 자각한 거지.


<#10LOGO#> 말하자면 이번 작업은 첫사랑을 보내주는 심정이겠다.
이용주 감독
: <건축학개론> 영화 자체가 그랬다. 과장이 아니라 다음 작품을 찍는다면 영화감독으로선 첫 작품이 될 거 같다. 사적인 의미 없이, 객관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재밌고 상업적인지 고민하며 쓸 수 있겠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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