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인연/ 피천득 지음/ 샘터/ 9000원
소설가 고(故) 박완서는 '인연'을 두고 '모든 군더더기를 떨어내고 남은 마지막 모습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감히 말하자면 이 책은 내게도 그랬다. 쓸데없이 덧붙은 것들을 덜어낸 간결한 문체와 담담한 서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좋았다.
'인연'에 실린 글 81편 가운데 유독 맘에 와 닿았던 건 '오월'과 '용돈', '딸에게'다.
'오월'은 첫 번째 문장이 인상적이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오월을 이렇게나 확실히, 또 맑은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다신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월은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라는 문장으로 이어지는 이 글은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라는 대목에서 강한 울림을 준다. 그 뒤를 잇는 문장도 압권이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인연'을 읽다 보면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오는 때가 종종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용돈'이라는 글을 볼 때다. 피천득은 여기서 '나는 양복 호주머니에 내 용돈이 칠백원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없다'고 썼다. 그는 용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먹거나 머리를 깎고, 영화를 본다고 했다.
용돈에 대한 얘기는 텔레비전과 냉장고로, 또 월급으로 넘어간다. 피천득이 내리는 결론은 간결하다. 용돈과 얼마의 책값을 벌기 위해 마음의 자유를 잃을까 불안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 다운 말이다.
'인연'에서 또 자주 읽는 글은 피천득이 딸 서영이에 관해 쓴 부분이다. 특히 '딸에게'라는 제목의 글이 참 좋다. '너는 아빠에게는 지금도 어린 소녀다. 네가 남에게 청아한 숙녀로 보이는 때가 오더라도 나에게는 언제나 어린 딸이다…어떤 길이든 네가 가고 싶으면 그것이 옳은 길이 될 것이다…안녕 안녕 아빠가'. 마치 '아버지' 피천득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인연'을 펼쳐두고 이곳저곳을 넘겨보고 있자니, 문득 책의 표지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살짝 열린 조개 속에서 빛나고 있는 진주. 이 진주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면 '인연'의 첫 장을 읽어보라. 거기에 답이 있다.
오늘은 '인연'을 첫 장부터 찬찬히 다시 읽어봐야겠다.
성정은 기자 j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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