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내 강력한 금연정책을 내놓겠다고 공언한 가운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26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관에서 열린 '한미 FTA와 금연정책' 심포지엄에서 이상윤 건강과 대안 책임연구원은 "정부가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가입 이후 금연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와중에 한미 FTA라는 복병이 나타났다"며 "담배회사들이 막강한 로비력 외에 투자자 국가소송제도(ISD)라는 칼을 하나 더 쥐고 정부의 금연정책 노력을 상당 부분 제약할 여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전 세계 170여개국이 약속한 세계보건기구(WHO) 주도 FCTC는 ▲경고그림 도입 ▲모든 실내작업장과 실내 공공장소의 금연구역화 ▲마일드·라이트 등 오도문구 금지 ▲포괄적인 담배광고 및 후원 금지 ▲소매점의 담배진열판매 금지 ▲자판기 판매 금지 등을 권고하고 있다. FCTC 비준국인 우리 정부도 오는 11월 제5차 총회 개최를 앞두고 담배 첨가제 성분 공개, 경고그림 삽입, 오도문구 금지 등을 포함하는 금연정책을 연내 입법한다는 계획이다.
김성수 법무법인 지평지성 파트너변호사(한국금연운동협의회 이사)는 "한미 FTA가 시행되면 정부가 금연정책을 강화하려해도 담배회사가 ISD를 무기로 국제 분쟁을 제기해 위협하거나 저지할 수 있다"면서 "캐나다, 우루과이, 호주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국제 분쟁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정책을 자진 철회하거나 유예하는 등 이른바 '냉각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캐나다는 1994년 담뱃갑에 회사 명칭 정도만을 간략히 표시해 회사간 경쟁적인 마케팅을 제한할 목적으로 담뱃갑 단순포장(plain packaging)방식의 규제를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 담배회사 레이놀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포함된 투자조항 및 ISD를 이용, 수억 달러의 보상금 요구와 함께 국제 분쟁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이 법안은 철회됐다.
실제로 필립모리스는 우루과이(2010년)와 호주(2011년) 정부를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했다. 그림 경고나 담뱃갑의 일정 면적 이상을 경고 문구로 채우는 등 FCTC의 비준국으로서 지켜야할 포장 및 라벨 규정을 문제 삼았다. 금연정책이 양자조약의 조항을 위반하며, 예측 불가능한 규제 체계로 인해 손해를 보게 생겼다는 이유에서다. 이 과정에서 필립모리스는 현지 법인을 통해 국제 분쟁을 제기하는 우회적인 방법까지 동원했다.
김 변호사는 "우루과이는 현지에 진출한 스위스 법인을 통해 집행정지 구제를 신청했고, 호주 역시 호주-미국 간 양자협약에 ISD가 없는 것을 감안, 호주 사업권을 가지고 있는 홍콩 지사가 호주-홍콩 간 협약을 근거로 제소하는 우회공격술을 썼다"고 지적했다.
이들 사례를 보면, 양자간 투자협정과 FCTC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FCTC 이행기준에 따라 금연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우리 정부도 담배회사의 제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이날 심포지엄에 참석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종훈 명지대 법대 교수는 "한미 FTA는 일방적인 갑과 을의 계약이며 한 마디로 실패한 협상"이라며 "FTA 부속서를 보면 정부의 금연정책 자체가 투자에 근거한 분명하고 합리적인 기대를 침해했다고 결론나면 국가가 손해배상을 해줘야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양동교 보건복지부 건강증진과장은 "ISD가 있는 한 제소 가능성은 있겠지만, 금연정책이 국제적인 공감대가 이뤄진 FCTC에 준거하고 있는 만큼 설령 제소를 한다고 하더라도 담배회사 측이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면서 "ISD 때문에 각종 금연정책이 위축되거나 좌절될 일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