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 앞까지 번진 혐오, 전국 2100장 인증
무한 증식 되는 '혐오 현수막'
서울 민원 1800건 폭주…가이드라인 한계
"떼면 소송 건다" 협박에 공무원들 골머리
'중국인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
지난 주말 서울 경복궁역 인근. 고궁 나들이를 나선 엄마 강모씨(42)는 아이가 현수막에 쓰인 글귀를 소리 내 읽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족 단위 방문객과 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곳에 혐오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강씨는 "얼마 전에도 '간첩이 뭐야'라고 묻는 아이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며 "관광지까지 혐오의 배설구가 됐다"고 고개를 저었다.
경찰 수사에도…"1월에만 2100장 살포"
무분별한 정치 현수막으로 도심 곳곳이 '혐오의 전시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행정 당국이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철거 직후 새로운 현수막이 내걸리는 등 '무한 증식'이 이어지는 모양새다.
10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전국에서 정비된 정당 현수막은 2만1247건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관련 민원은 9682건 접수됐다. 특히 서울에서 현수막 3870건이 정비됐고, 1869건에 육박하는 민원이 집중됐다. 지난해 11월 이재명 대통령이 '저질 현수막'에 대한 대책 마련을 주문한 뒤 행안부가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지만, 철거보다 '증식'이 더 빠른 상황이다.
최근 도심을 점령한 일부 혐오 현수막의 상당수는 이른바 '애국'을 표방하는 한 민간단체에 의해 설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튜브·온라인 설문을 통해 사다리를 갖춘 자원봉사자를 전국적으로 모집하고 있다. 한 커뮤니티에 게재된 이 단체의 내부 설치 인증사진에 따르면 지난 1월에만 전국에 살포된 현수막이 2100건을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단체의 조직적인 현수막 설치는 행정 당국의 단속을 앞지른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여성 봉사자 4명이 밤샘 작업으로 23장을 설치했다"는 '무용담'이 공유되기도 했다. 옥외광고물법상 정당 현수막은 별도 신고 없이 15일간 게시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해 혐오 표현을 쏟아내는 창구로 쓰고 있는 셈이다.
"떼면 소송, 안 떼면 민원"…행정력 고갈
현수막 살포가 집중되는 서울 지역 일선 자치구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한 자치구 공무원은 "현수막 하나 떼는 데 법리 검토와 정당 통보까지 최소 며칠이 걸리는데, 저들은 문구를 바꿔가며 하룻밤에 수십장씩 걸고 간다"며 "단속이 확산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토로했다.
성동구는 최근 아이들이 지나다니는 통학로 인근에서 발견된 '중국개입 부정선거'란 현수막 문구를 '인종차별'로 판단해 게시 종료 전 전격 철거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동대문구 역시 행안부 가이드라인 시행 후 올해 1월 말까지 총 120건의 불법 정당 현수막을 강제 정비했다. 하지만 최근 철거를 단행한 6곳의 서울 자치구를 대상으로 단체 측의 고소·고발 협박이 뒤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초구의 경우 지난해 9월부터 올 1월까지 기간 위반 등 형식적 요건으로 208건을 정비했으나, 내용에 손을 댄 건수는 한 건도 없었다. 철거를 하면 '표현의 자유 침해', 방치 시에는 '직무유기'라며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 속에 행정력은 고갈 상태다.
전문가들은 '명의대여'라는 탈법과 '혐오'를 용인하는 느슨한 법 체계가 문제라고 분석한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현수막은 불특정 다수가 거부할 권리 없이 노출되는 매체"라며 "혐오 표현을 가려낼 명확한 법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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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강제력이 약한 가이드라인보다 처벌 강화로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현재 국회에는 정당 현수막 규제를 강화하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다수 발의돼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수막을 통한 무분별한 혐오 표현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파괴한다"며 "가이드라인을 넘어 벌금 부과 등 강력한 처벌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호수 기자 lak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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