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김재환에게 지난해는 악몽과 같았다. 성적 부진에 보기 드문 불명예를 함께 떠안았다. 금지약물 복용이다. 지난 9월 제39회 야구월드컵을 앞두고 받은 국내 도핑검사에서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금지목록 가운데 하나인 S1 동화작용 남성호르몬 스테로이드 ‘1-테스토스테론 대사체’가 검출돼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로부터 양성반응 판정을 받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도핑금지규정 제6조에 의거, 김재환에게 2012시즌 1군 10경기 출장 정지의 제재를 부과했다. 징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진욱 두산 감독은 “사태의 심각성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며 ‘무기한 훈련중지’라는 가중처벌을 내렸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 김재환은 잇따른 제재를 선수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배명고, 남해, 잠실구장 등을 떠돌며 훈련에 매진했고 김 감독과의 수차례 면담을 통해 지난 과오를 반성했다. 스승과의 신뢰관계는 한층 두터워졌다. 실력도 부쩍 향상돼 올 시즌 주축으로 일어설 발판을 마련했다. 속내를 읽힌 김 감독은 더 이상 징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4개월여 만에 근신처분을 철회하고 19일 떠나는 미국 애리조나 전지훈련 명단에 김재환을 포함시켰다. 다시 기회를 얻은 김재환에게 올 시즌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지난 11일 훈련을 마치고 만난 그는 물음에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속죄와 보답”이라고 짧게 답했다.
다음은 김재환과의 일문일답
스포츠투데이(이하 스투) 최근 몸 상태는 어떠한가.
김재환(이하 김) 훈련을 멈추지 않은 덕에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무기한 근신처분을 받았지만 연습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배명고에서 따로 개인훈련을 가졌고 지난 12월부터 잠실구장에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투 인천고 출신이다. 배명고와의 인연은 처음일 것 같은데.
김 자택이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해 있다. 인천까지 가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그나마 가까운 배명고를 무작정 찾아갔다. 코칭스태프에 인사를 드리고 함께 운동을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윤여국 감독은 요청을 흔쾌히 받아줬다.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스투 처음 만난 감독에게 훈련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김 절실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것 같다. 징계 소식을 접한 뒤 ‘여기서 주저앉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간절함이 있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스투 구단으로부터 징계는 언제 어떻게 받았나.
김 김진욱 감독의 선수단 첫 미팅에서 직접 전달받았다. 솔직히 무기한 근신처분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김진욱 감독은 선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선수단 훈련에 나오지 말라”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멍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근신처분 앞에 붙은 ‘무기한’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스투 이후 김진욱 감독과 따로 면담을 가졌나.
김 미팅 뒤 바로 감독실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눴다. 김진욱 감독은 “‘무기한’이라는 단어를 잘 생각해라”라고 거듭 강조했다. “징계 해제 시점은 너에게 달렸다”라는 말에 솔직히 막막했다. 2012시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내게 정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스투 김진욱 감독이 원망스러웠나.
김 (고개를 가로저으며)오히려 그 반대였다. 면담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그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징계로 인해 여느 때보다 나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숨 막히게 달려왔던 시간을 되돌아 본 좋은 계기였다.
스투 징계 뒤 바로 서울을 떠났다.
김 열흘 동안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이모 댁에서 지냈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열흘 즈음 지났을까. 이렇게 주저앉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짐을 챙겨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투 국내에서 받은 도핑검사에서 S1 동화작용 남성호르몬 스테로이드인 ‘1-테스토스테론 대사체’가 검출돼 양성 판정을 받았다. 어떤 약을 복용한 것인가.
김 잘 모르겠다. 인천고에서 함께 야구를 했던 친구 가운데 트레이너가 있다. 경기를 마칠 때마다 그 친구가 일하는 스포츠클럽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는데 하루는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며 자연스럽게 약을 하나 건네줬다. 솔직히 일반 피로회복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약을 입에 가져갔다. 약의 이름은 KADA에서 날아온 도핑검사 결과 용지를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너무 낯설어 정확한 명칭은 기억하지 못한다.
스투 약을 총 몇 차례 복용했나.
김 그 날 한 번 섭취한 것이 전부다. 9월 24일 벌어진 일이다. 다음날이 야구월드컵대표팀 소집일이라 날짜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스투 트레이너인 친구를 많이 원망했겠다.
김 그렇지 않다. 과정이 어떻든 약을 먹은 주체는 나 자신이니까. 스스로 감수해야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검사 결과에 당황한 건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 없다”라는 말에서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서로 연락이 뜸해졌다. 그게 조금 안타깝다.
스투 양성 판정은 언제 어떻게 전달받았나.
김 미국과의 야구월드컵 2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구단 관계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도핑 양성 판정이 나왔으니 파나마에서 돌아오면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당시만 해도 이렇게까지 사건이 커질 줄 상상하지 못했다.
스투 이후 열린 호주와의 5-6전을 출전하지 않았다. 양성 판정의 여파 탓이었나.
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라인업에서 제외되었을 뿐이다. 발목이 조금 아팠다. 약물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스투 파나마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꽤 무거웠을 것 같다.
김 불운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대회 마지막 날 샤워를 하다 휴대폰을 떨어뜨렸는데 물에 빠져 그만 고장이 나버렸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미국에서 만나려고 했던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실 파나마로 향하는 길부터 고생의 연속이었다. 비행기에 오르고 18시간이 지나서야 미국에 도착했는데 공항에서 무려 7시간을 대기했다. 다시 항공편을 이용해 6시간을 날아간 뒤에야 파나마 땅을 밟았는데 호텔로 이동하는데 다시 4시간을 버스에서 보냈다.
스투 그래도 낯선 파나마 땅에서 재미있는 추억 하나쯤은 만들었을 것 같은데.
김 호텔이 시골에 위치해 있어 야구 외에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윤지웅(LG) 등 동갑내기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휴식의 전부였다.
스투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지약물 사건이 불거졌다. 가족들의 걱정이 많았을 것 같은데.
김 부모님은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평소처럼 대해주셨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이 많으셨을 거다. 불효를 씻기 위해서라도 올 시즌 꼭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
스투 무기한 근신처분 뒤 김진욱 감독과 자주 전화통화를 가졌다.
김 막상 통화가 연결되면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눈물만 났다.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는데 근신처분으로 그럴 수 없어 답답했다.
스투 김진욱 감독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
김 물론이다. 2008년 두산에 입단했을 때부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누구보다 나에 대해 잘 아는 지도자다. 생각해보면 무기한 근신처분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었다. 지난 시즌 중반부터 나 자신을 내려놓을 때가 많았다. ‘왜 안 될까’라는 생각으로 거의 매일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기한 근신처분은 그런 나를 함께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고집이 센 편이라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편인데 적절한 처방을 내려주신 것 같다.
스투 김진욱 감독은 지난해 5월 31일 2군 투수코치에서 1군 불펜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다. 당시 당신도 1군 명단에 함께 이름을 올렸는데.
김 그날 1군 선수단이 인천 문학구장에서 SK와 맞붙었는데 김진욱 감독의 자가용을 타고 함께 이동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조언을 많이 들었다. “네 것만 하면 된다”라는 충고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라운드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라고 강조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 너무 죄송했다.
스투 평소에도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이었나.
김 그렇진 않았다. 김진욱 감독은 필요한 말만 꺼낸다. 이천 베어스타운에서 밤늦게 혼자 배트를 휘두를 때면 몰래 숨어 훈련을 지켜보셨다. 다음날 “훈련은 잘 됐니?”라고 물어볼 법도 한데 늘 그냥 지나치셨다. 눈이 마주쳐도 빙그레 미소만 지으셨다.
스투 징계해제 전까지 김진욱 감독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나.
김 (최)준석이 형의 결혼식 때 만나 뵙게 되어 인사를 드렸다. 김진욱 감독은 “어디서 운동을 하고 있는지 다 전해 듣고 있다. 열심히 훈련에 매진해라”라고 했다. ‘나를 잊으신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가슴을 졸였는데 그 말 한 마디에 큰 힘을 얻었다.
스투 근신에서 자유로워지기까지 4개월여가 걸렸다.
김 운동을 게을리 했다면 징계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내 자신을 반성하고 땀을 흘려 겨우 믿음을 안겨드린 것 같다.
스투 해제 소식은 김진욱 감독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았나.
김 1월 5일 구단 관계자의 전화에 바로 감독실을 방문했다. 김진욱 감독은 “지금부턴 야구로 잘하면 되는 시간이다”라고 했다. 올 시즌 믿음에 꼭 보답하고 싶다.
스투 이번 일로 많은 네티즌들에게 질타를 받고 있다.
김 반응이 이렇게까지 뜨거울 줄은 몰랐다. 질타를 충분히 이해한다. 도핑테스트 실시 뒤 처음으로 적발된 국내 선수 아닌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스투 이번 징계를 겪으며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다.
김 친구들이나 팀 동료들이 과묵했다고 하더라. 진지해졌다는 말도 적잖게 듣는다. 내가 봐도 조금 바뀐 것 같긴 하다.
스투 약물 복용에 신경이 많이 쓰이겠다.
김 솔직히 감기약 한 알도 쉽게 입에 넣지 못하고 있다. 프로틴(단백질)도 멀리 하게 됐고. 금지약물의 위험을 깨닫게 됐지만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스투 금지약물 복용 외에도 지난해 여러 가지 악재를 겪었다. 특히 6월 8일 KIA전에서 오른 발목 인대를 부상당했다.
김 7회말 수비에서 사인 미스로 생긴 패스트볼을 잡으러 달려가다 사고를 당했다. 공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신발의 징이 인조잔디에 끼여 눈앞에서 오른 발목이 돌아갔다. 사실 경기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부상은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스투 당시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김 1루 주자 안치홍이 패스트볼을 틈타 2루에 안착했는데 사고가 난걸 알았는지 이내 3루로 뛰려고 했다. 그걸 저지하려고 발목에 무리하게 힘을 주다 인대까지 찢어지고 말았다. 되돌아보면 그게 수난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스투 올 시즌 목표는 무엇인가.
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세워놓지 않았다. 분명한 바람은 있다. 선수생활의 전환점이 됐으면 좋겠다. 꼭 폭발하고 싶다. 그래서 김진욱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
스투 김진욱 감독은 올 시즌 당신을 1루수와 외야수로 기용하겠다고 했다.
김 징계방침을 철회해주시던 자리에서 보직 변경에 대한 뜻을 직접 전달받을 수 있었다. 큰 고민 없이 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자리를 내 몫으로 여기는 건 아니다. 팀을 위한 결정이다. 베테랑인 김동주 선배는 체력이 떨어지면 지명타자로 출전할 수 있다. 나는 그 뒤를 메워야하는 위치에 있다. 대비를 하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스투 포수 마스크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텐데.
김 내 자리가 포수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4살 때부터 해온 포지션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겠나. 사실 이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인천고 2학년 때 1년 선배인 SK의 (이)재원이 형에게 밀려 1루수를 담당했다. 포수 마스크는 재원이 형이 졸업한 뒤에야 다시 쓸 수 있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실력으로 검증받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스투 이재원과 당신은 아마추어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프로에서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김 재원이 형과 그 점에 놓고 대화를 많이 나눈다. 내가 “우리 왜 이렇게 됐을까”라고 물으면 재원이 형은 “네가 잘해야 형도 잘 할 것 같다”라고 답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모두 빛을 보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스투 경쟁자인 양의지와는 친하게 지내나.
김 물론이다. 그간 라면을 함께 끓여먹으며 돈독한 정을 쌓았다(웃음). 라이벌 의식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 어차피 넘어서야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니까.
스투 그래도 목표로 정한 선수가 있을 것 같은데.
김 지금껏 ‘누구처럼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저 학교에서 제일 잘하는 선배를 뛰어넘자는 생각으로 훈련을 임했다. 인천고에서 그 대상은 재원이 형이었다. 출중한 실력을 자랑해 많은 노하우를 익힐 수 있었다. 두산에서는 타격과 수비 두 분야로 나뉜다. (김)현수 형과 (용)덕한이 형을 통해 많은 걸 공부하고 있다.
스투 그간 노력이 올 시즌 얼마나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김 최근 답답한 마음에 청담동에서 용하기로 소문난 점집을 다녀왔는데 그곳의 무속인이 그러더라. 지난해는 뭘 해도 안 되는 팔자였다고(웃음). 겪었던 악재들을 척척 맞춰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스투 올해는 어떻다고 하던가.
김 이런 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면 안 되는 법이다. ‘노 코멘트’다. 그냥 기대해 달라(웃음).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