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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 칼럼]'그 굳고 정한 갈매나무'

시계아이콘01분 42초 소요

일을 해도
일을 해도 여전히 고달픈 생활
물끄러미 손바닥을 보고 또 보네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ㆍ1886~1912)의 하이쿠(俳句) 한 수다. 이시카와는 서민의 아픔을 그린 생활시를 많이 남겨 일본인의 사랑을 받는 '국민 시인'이다.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의 부당함을 비난하고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시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사회주의 성향의 시인이기도 한다. 본명이 백기행인 시인 백석(白石)이 자신의 필명 '石'을 '이시카와(石川)'에서 따왔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우리 시단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은 인물이다.

[어경선 칼럼]'그 굳고 정한 갈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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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은 공연히 사람을 감상에 젖게 만든다. 이시카와를 떠올린 건 아마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평생을 일자리를 찾아 떠돌며 가난과 싸우던 그다. 곤궁함을 견디다 못한 아내는 딸을 데리고 가출하고 아버지도 뒤이어 집을 나간다. 집에 남은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숨지고 한 달여 후에 자신 또한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고작 26세 때다. 그의 슬픈 생애가, 스산한 겨울 바람과 함께 내 삶 속으로 헤집고 들어온 것일 게다.


그러나 이시카와의 짧은 시가 떠 오른 건 그 때문만은 아니지 싶다. 시인의 가슴에 가난이 절절히 배어 있던 탓일까. '워킹 푸어(working poor)'를 이처럼 간결한 시어로 표현한 시인이 또 어디 있을까. 일을 해도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고달픈 생활,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현실의 삶이 이시카와의 시구와 다르지 않다는 막막함이 마음을 흔든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통계청이 내놓은 '2011 사회조사'는 우리 사회에 절망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게 드리우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가구주의 비중이 52.8%로 2년 전에 비해 2.1%포인트 줄었다. 반면 사회ㆍ경제적으로 하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45.3%에 달했다. 2년 전보다 2.9%포인트가 높아졌다. 마음을 더 짓누르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일생을 노력해도 사회ㆍ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고 본 국민이 58.7%에 이른다. 가능성이 높다는 응답은 28.8%에 그쳤다. 더욱이 자식들도 그럴 것이라는 암담함은 더 아프게 다가온다. '자식 세대는 노력으로 계층 이동이 가능할 것이냐'는 물음에도 가능성이 낮다(42.9%)가 높다(41.7%)보다 많았다. 나도, 자식도 아무리 노력해도 생활이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거라는 비관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다.


베이비부머 가장의 자살과 이혼이 늘고 있다는 우울한 통계나 정부 내에서조차 발행량을 줄여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복권 판매량이 급증하는 것이 절망의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살 수 없을 거라고 느끼는 순간, 기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도둑질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 '한 탕'을 노리고 합법적인 도박에 눈을 돌리는 건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일 터다. 자살이라는 극단을 선택하는 이유도 그렇고, 술 마시는 이들의 53%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라는 조사 결과도 좌절감에 빠진 사회의 한 단면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답답한 것은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은 대체로 해결책을 도모할 위치에 있지 않고, 해결책을 도모할 위치에 있는 자들은 말만 번드르르 할 뿐 행동으로는 쉬 옮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닷새 후면 새해다. 현실은 막막해도, 그렇더라도 '희망'의 덕담 한마디는 나눠보자. 백석이 겨울밤 남신의주 유동의 한 목수네 집 헌 방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중에도, 한겨울 눈발에도 의연히 서 있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떠올린 것처럼.






어경선 논설위원 euh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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