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아보듯 강렬한 눈빛으로 걸어 들어온 세종. 한동안 아버지 이방원과 대치하더니 털썩 무릎을 꿇는다. "살려주십시오. 상왕에게 대적한 소인의 잘못입니다. 죽어 마땅하나 부모보다 앞서는 불효가 될까 걱정입니다." 목숨을 구걸하는 세종에게 이방원이 다가가며 하는 말. "네 말에는 충효예(忠孝禮) 다 있지만, 한가지 진심이 없다." 엎드린 세종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스친다.
요즘 인기가 높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한 장면이다. 세종의 색다른 면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필자는 진정한 후흑의 달인을 본 듯 했다. 후흑(厚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줄임말로 중국 청나라 말엽 이종오가 저술한 '후흑학'에 나오는 말이다.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속마음을 뜻한다. 우리말의 뻔뻔함과 음흉함 쯤으로 해석되는데 그러다 보니 비겁한 처세술 정도로 오해를 사고 있는 면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종오가 주장한 후흑은 '난세에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종오가 뽑은 역사상 후흑의 대표적인 인물은 월왕 구천과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 구천은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의 주인공이고, 유비는 늘 울고 다니면서 동정을 산 이미지메이킹의 천재였다는 것이 이유다. 우리나라에도 있다. 이도 옳다, 저도 옳다 어느 누구의 미움도 사지 않으려 한 황희 정승과 왕위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 반건달 노릇을 하다 결국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든 흥선대원군이 후흑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세종도 그 반열에 오를 만 한 것이다.
물론 드라마다 보니 픽션의 소지가 있겠으나, 세종은 서슬 퍼런 태종 이방원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학자들과 글이나 읽겠다'며 심중을 숨긴다. 그에게 후흑이 없었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종대왕'도 없지 않았을까. 후흑의 실천지략 중 대표적인 것이 공(空)이다.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한 가지 일에 전념하되, 인내심을 가져야지 조급하게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오늘 효과가 없으면 내일이 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세다.
또한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그 길로 도망가면 되기 때문에 후사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지략은 농(壟)이다. 귀머거리와 벙어리처럼 처신하라는 뜻이다. 흉중에 깊숙이 감춰둔 목적을 위해 취하는 일종의 연막전술이다. 그래서 후흑을 승자의 전략이라 하는 것이다.
후흑학은 난세의 학문이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로울 때는 공맹(孔孟)의 정도가 합당하다. 그러나 세상이 불안정하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고, 질서가 제대로 안 잡힐 때는 어찌해야 할까. 끝까지 명분과 인의(仁義)를 찾으며 독야청청해야 할까. 구한말 왕도 운운하던 사대부들의 패착을 반복해야 할까.
21세기는 서구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가 저물고,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대격변의 시기라고들 한다. 미국과 소련, 양강 구도가 무너지면서 중국을 비롯한 새로운 패권 세력들이 등장했다. 구호물자에 의존하던 대한민국 같은 나라들이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최빈국이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풍부한 자원을 앞세워 발언권을 강화하고 있다. 대신 세계 경제를 주무르던 일본은 침몰하고 있다. 전통과 문화의 중심지로 의기양양하던 유럽국가들은 노쇠한 종이 호랑이가 되고 있다. 말 그대로 어지러운 세상, 난세다.
난세를 살아가는 우리도 세상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케케묵은 이념 논쟁을 벌이는 정치권, 탁상공론에 익숙한 관료들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특히 총성없는 전쟁터를 누비는 기업들은 난세의 성공비결, 후흑에 주목해 보자. 또 하나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미나 IGM(세계경영연구원)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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