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적이 되기에 딱 좋은 시절입니다. 세계 경기침체와 관련된 뉴스가 연일 들려옵니다. 장기 전망도 사실 밝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대로 기후변화가 계속된다면 세계 곳곳의 기상이변이 가속화되어 주기적인 식량부족과 자연재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거의 확실하게 100년 이내에 세계경제가 성장을 멈춰버리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세계적인 이슈들보다 요즘 저를 더 비관적으로 만드는 것은 인터넷 댓글들입니다. 신문사들의 누리집에서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읽어보노라면 우리 동시대인들의 마음 속에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얼마나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선행의 배후에는 개인적 이기심과 욕망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댓글들에 선연히 드러납니다. 기부도 봉사도 다 욕망의 다른 이름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자는 제안 따위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음모에 불과하다고 댓글들은 비아냥댑니다. 이런 왜곡된 시선이 저를 우울하게 합니다. 댓글을 쓰는 사람들이 좀 유난스러운 사람들이겠지 애써 생각해보지만 이런 냉소와 혐오는 사실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적잖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혐오와 냉소의 시작은 몇몇 정치인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숭고한 구호의 이면에서 발견되었던 어두운 뒷소식들이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발전된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누구 탓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기준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 이름 붙여버리는 것은 사람들을 폄하하는 손쉬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손쉬움의 대가는 결국 세상엔 도둑놈만 가득하다는 자기혐오입니다.
고결한 주장의 뒷면에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이기심이 배어 있다 하더라도 그 구호와 주장을 통해 세상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주장했던 이유는 그가 인류의 보편인권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미국 남부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유럽의 지원을 막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것, 위대한 연설로 기억되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사실 분방한 사생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런 뒷이야기들이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흠집을 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역사를 진보시킨 위대한 자취를 남겼다는 점은 여전히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뉴트리노가 정말 빛보다 빠른지에 대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유럽 입자물리학 연구소(CERN)의 실험 결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상반되는 결과를 얻은 것이지요. 성급한 기사들은 타임머신 운운하지만 제가 확신하건대 이 연구가 실용성을 갖게 되는 데는 적어도 수십년 이상은 걸릴 것입니다. 한마디로 돈 안 되는 연구지요. 그래도 학자들은 이런 유의 연구에 기꺼이 평생을 겁니다. 이들은 위인도 성자도 아니며, 다른 이들과 똑같은 욕망에 시달리지만 금전적인 욕구 이외의 가치에 마음을 뺏긴 사람들입니다.
돌이켜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열정들이 모여 역사는 진보해왔습니다. 세상에 전쟁이 창궐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전쟁이 상시화되어 늘 죽을 위험에 시달리던 선사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사는 것 같지만 지구 먼 곳의 고통에 공감하고 나누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후변화가 거꾸로 우리가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키우는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날 선 인터넷 댓글을 쓰던 사람들이 어느 날 머쓱하게 머리 긁으며 서로 포옹하는 날, 그런 날이 오길 꿈꿔봅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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