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노인영화제 대상 이현명씨 '고희가(古希歌)'
[아시아경제 조유진 기자]인생 70은 원래 '드문 나이(古稀)'를 뜻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의 어원을 바꿔 나가는 사람이 있다. 인생 70은 '새로운 희망(希望)'을 찾는 나이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希)'라고 써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3일까지 열린 제4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갈증'이라는 제목의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대상을 거머쥔 '고희의 영화감독' 이현명(70·여·사진)씨가 그 주인공이다.
사람의 마음은 젊고 늙음에서 가려지는 게 아니라고 외치는 그를 제15회 노인의날인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 미금동 청춘극장에서 만났다. 어느덧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대한민국. 국민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일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2030년·통계청)가 20년도 채 안 남은 시점에서 들어본 이씨의 목소리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결코 '노인'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강하게 웅변하고 있었다.
기자와 마주한 이씨는 가죽부츠에 붉은 뿔테 안경을 쓴 '젊은' 모습이었다. 영화와 함께 '즐거운 인생' 2막을 시작한 그는 인터뷰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가 캠코더를 들고 영화 제작에 나서게 된 건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미디어수업을 듣고 나서다. 늘 아프고 몸이 약했던 이씨는 좀 더 활달한 인생을 살기 위해 그동안 관심이 있었던 영상제작 수업을 찾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노인 문화활동을 지원하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고 바로 등록했다. 2008년의 일이다. 이씨는 이후 약 2년 동안 이 수업을 들으며 영화 기획 요령, 카메라 작동법, 편집 기술 등을 익혔다.
이씨에게는 6mm 캠코더를 들고 렌즈를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삶의 큰 활력이 되었다. 그는 이번 영화제에 출품한 '갈증'이라는 작품을 위해 유치원 아이들부터 종교인, 문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가 영화의 뼈대를 이룬다. 20분 30초의 단편 영화지만 1년에 가까운 제작시간이 들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출연 배우를 직접 섭외하기 위해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영화에 삽입되는 내레이션의 정확한 발음을 위해 발성 교육도 받았다.
영화촬영이 시작되고 7개월쯤 지나서 이씨는 주차장 철제문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3개월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영화를 포기할 생각도 했지만, 몸이 약해지고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캠코더를 들고 돌아다니던 때를 그리워하게 됐다.
젊은시절부터 유난히 사고와 병치레가 많았다는 그는 “일생동안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할 만큼 화려한 병력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30대에 연탄가스를 맡고 1년 가까이 식물인간이 돼 누워있어야 했고, 3년 전에는 내시경 검사중 식도가 손상돼 한 달여간 7kg 이상이 빠지면서 골다공증에 시달렸다. 일생동안 병을 안고 살았다고 할 만큼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를 위축시키는 건 아픈 몸이 아닌 '노인'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었다.
이씨는 “노인이라는 말 좀 안했으면 좋겠다. 노인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위축시킨다”면서 “'늙어라 늙어라'하는 것 같지 않느냐”고 했다. 벌써 내년 영화제 출품 작품을 구상중이라는 이씨는 “'숫자'가 많아지는 사람들이 '노(老)'자를 가슴속에서 내보내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조유진 기자 t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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