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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연기인생 15년, 이젠 한계에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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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연기인생 15년, 이젠 한계에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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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은 칭찬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다. 자화자찬은 농담이라도 들어볼 수가 없다. “철학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가벼운 사람”이라고 자신을 평가하는 그의 웃음 속에는 한계 상황에 부딪힌 연기자의 고민이 담겨 있다. <강철중: 공공의 적 1-1>, <이끼>와 <글러브> 등 강우석 감독의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던 그가 현재의 고민을 담아 내놓은 작품이 <카운트다운>이다. <별주부전>을 연상케 하는 소재의 이 영화에서 정재영은 자신에게 간을 이식해줄 여자를 찾아다니는 채권추심원 태건호를 연기했다. 9년 전 전도연과 처음으로 함께 출연했던 영화의 제목만큼이나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스릴러에서 신파 드라마로 반전을 꾀하는 영화만큼 태건호라는 캐릭터 역시 그리 간단치 않다. 아들의 부재에 대한 트라우마로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태건호를 연기하기에 “내공이 딸렸다”고 정재영은 고백했다. <카운트다운>을 막 내놓은 지금도 그는 자신의 연기에 인색한 평가를 내린다. 자화자찬은 커녕 “업그레이드가 안 된 느낌”이란다. 한계 상황에서 정재영은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

<#10LOGO#><카운트다운>으로 처음 해외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해외 국제영화제에서 자신의 영화를 보는 느낌은 어떻던가.
정재영: 호응이 좋아서 믿질 못하겠더라. 기사를 보면 늘 ‘10분 기립박수’라고 하잖나. 토론토에서는 약 5만 원의 입장권으로 유료 상영을 했다. 프리미어 상영이었는데 전날 예매가 80%가 되고 현장에 관객들이 줄을 서 있는 광경을 보니 기뻤다. 예전엔 개봉 첫날 서울극장 앞에서 줄 서 있는 관객들을 커피숍에 앉아서 보곤 했는데 그런 재미를 느꼈다. 영화제라서 그런지 예의상 박수를 잘 쳐주는 것 같았다. 인터뷰 때는 질문들이 특이해서 재미있었다. 조폭들이 싸울 때 왜 총을 사용하지 않는지 묻는 식이었다. (웃음)


“<카운트다운>, 새로운 형식에 끌렸다”


정재영 “연기인생 15년, 이젠 한계에 부딪힌다”


<#10LOGO#><카운트다운>에서는 웃은 장면이 거의 없다
정재영: 그 점이 두려웠다. 내가 조금 웃겨주겠지, 하고 기대했던 분들에겐 배신이니까. 그래도 맨날 그런 것만 할 수 없잖나. 배우로서 새로운 것도 해야 한다. 관객들이 태건호를 따라가야 하는데 캐릭터가 좀 지루해서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많았다.


<#10LOGO#><카운트다운>은 전혀 다른 두 장르가 앞뒤로 연결된 영화다
정재영: 양날의 칼이다. 내겐 그런 부분이 신선했다. 뻔한 추격전도 아니고 흔한 신파극도 아니다. 선입견을 없애고 보면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데, 전개를 예상하고 보면 헷갈리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을 감독도 고민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다. 예견된 결말로 가도 상투적이라고 비판받았을 것 같다. 원래는 플래시백 장면도 초반부터 많이 있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땐 그게 헷갈려서 몰입이 안 됐다. 감독이 초반부의 플래시백을 빼버리고 압축해서 뒤에 몰아넣었다. 처음엔 굉장히 무거운 영화였는데 그걸 최대한 밝게 만들려고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트 영화를 상업적인 영화로 만들었다고 할까.


<#10LOGO#><카운트다운>이 좋았던 지점은 무엇인가.
정재영: 방금 말했던 것처럼 새로움이었다. 초반엔 액션영화나 누아르, 범죄드라마처럼 흘러가다가 점점 주인공의 아들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보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고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영화가 상상한대로 흘러가면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 덜 재미있다고 느끼게 된다. <카운트다운>은 머리를 많이 쓴 시나리오다. 구성이 탄탄해서 좋았다. 그러나 복잡한 게 단점이기도 하다. 일부분만이라도 이야기가 빠지면 평범해질 것 같은 구성이다.


<#10LOGO#>병원에서의 엔딩 부분이 길다는 지적도 있다.
정재영: 편집 과정에서 에필로그가 길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다. 연기하면서도 적정선을 잡기 힘들었다. 감정을 잡고 가는 게 쉽진 않았다. 내공이 딸리더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다른 영화를 참고할 수도 없었다. 그저 나로선 성심성의껏 하는 거다. 리얼리티를 따지만 그보다 더 헐떡거리고 힘들어 해야 하지만 영화적인 표현은 상영된 버전이 맞는 것 같다.


<#10LOGO#>태건호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갔나.
정재영: 기억은 잃었지만 과거는 잊지 않은 인물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야 뒤로 가도 반성의 의미가 있고 진정성이 느껴질 테니까. 채권추심원처럼 모든 걸 잊어버린 인물로 설정했다면 과거가 하나둘씩 나올 때 생뚱맞을 것 같았다. 무뚝뚝하고 거칠며 냉정한 척하지만 비밀스런 과거가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인물이어야 했다. 원래 말 없는 애들이 뭔가 있어 보이지 않나. 반대로 난 가볍잖나. 철학도 전혀 없을 것 같고. (웃음)


“영화 속의 내 목소리는 아직도 낯설다”


정재영 “연기인생 15년, 이젠 한계에 부딪힌다”



<#10LOGO#>태건호는 평소의 정재영과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무척 어울리기도 하다.
정재영: 태건호는 나와 전혀 다른 인물이어서 그걸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내겐 도전하는 재미가 있었다. 편한 건 아니었다. 연기하기엔 <글러브>가 훨씬 편했다. 연기랄 것도 없었다. <이끼> 같은 작품은 정말 힘들다.


<#10LOGO#>자신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때 쾌감을 느끼지 않나.
정재영: 쾌감은 아니다. 나와는 다른 인물이니 익숙하지 않다. 내가 봐선 잘 모르겠다. 그런 건 남이 평가하는 거니까. 항상 어색하고 불안하다. 그렇지 않게 되는 날이 있을까? 내 목소리를 내가 말하면서 듣는 건 괜찮은데 녹음된 걸 들으면 아직도 낯설다. 다른 배우들은 안 그렇다는데 난 낯설더라.


<#10LOGO#>영화 속의 정재영을 보면 거친 모습과 코믹한 모습을 오간다.
정재영: 그런 측면들이 모두 내게 있는 것 같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감정을 연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카운트다운> 같은 경우는 가장 건조할 때를 생각하고 연기했다. 내 성격 중에선 작은 부분이지만 가장 우울할 때를 생각하며 그걸 확장시킨다. 그런 감정만 계속 이어가려니 힘들더라. 감정이 풀려 있으면 좋은데.


<#10LOGO#>참고할 만한 캐릭터는 있었나.
정재영: 감독에게 추천할 만한 게 없냐고 물어봤더니 영화 <더 로드>를 말하더라. 캐릭터만 보라고 했다. <더 로드>처럼은 만들지 말자고 했다. 태건호라는 인물의 모티브는 그 영화에서 시작된 것 같다.


<#10LOGO#>모든 것을 잃은 태건호가 간절히 살려고 하는 이유가 영화적으로 잘 설명돼 있지 않다.
정재영: 접근방식의 문제다. 태건호가 왜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이유를 만들기 위해 뭔가를 만들어도 보고 추가시켜보기도 했지만 더 지저분해지더라. 그래서 있는 것마저 빼버렸다. 시나리오상으로는 원래 태건호에게 아내가 있었고 집도 있었는데, 그런 이유들을 만들수록 더 구차해지고 무거워졌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빼고 아예 촬영도 안 했다. 태건호에겐 그게 더 맞다고 판단했다. 아들이 죽은 것도 진짜 잊어버린 것인지 잊고 싶어서 잊힌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테이프를 듣고 알게 된 것도 다신 꺼내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10LOGO#>추운 겨울에 바다 속에서 연기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정재영: 나도 추웠지만 민(미쓰에이)은 등장하자마자 납치당하고 얻어맞고 물에 빠지는 연기를 해야 했다. 덜덜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묵묵히 촬영하더라. 월스트리트 증권가에서 일하는 사람 같았다. 나 같으면 뻗어서 못 일어날 것 같던데…. (웃음)


<#10LOGO#>허종호 감독과 촬영 전날 밤마다 술을 마시며 촬영에 대해 미리 이야기했다고 들었다.
정재영: 미리 찍을 걸 정리하는 거다. 그때 정하고 나서 현장에서 맞추면 되니까 더 효과적으로 찍을 수 있었다. 허 감독과는 그런 면에서 궁합이 잘 맞았다. 모든 감독과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영화는 결국 감독의 예술이라서 배우가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다.


“계속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한계에 부딪힌다”


정재영 “연기인생 15년, 이젠 한계에 부딪힌다”



<#10LOGO#>전도연과 처음 함께 연기했던 2002년 당시에 대해 기억한다면.
정재영: 처음 만나면 하루 정도는 서로 어색하다. 전도연은 당시에도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였으니까. 무척 쑥쓰러웠다. 그런데 전도연을 때리는 역할이라니,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액션스쿨에 같이 갔는데 똑같이 훈련을 받더라. 액션 장면도 별로 없는데 말이다. 이틀째 만나선 내게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묻더라. 우리 관계가 영화 속 인물들처럼 빨리 진척이 돼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깡도 있는데다 엄청나게 현명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여느 남자배우 이상이라는 걸 느꼈다. 연기할 땐 상대배우를 매우 편하게 해주고 몰입하게 해준다. 여자로서 육체적으로 힘든 연기가 많았는데도 한 번도 촬영을 중지한 적이 없다. “연기를 할 때 내 몸뚱아리는 내 몸뚱아리가 아니다”라고 말할 만큼 액션이건 노출이건 몸을 아끼지 않는다. 배우로서나 자연인으로서나 최고의 마인드를 갖고 있는 최고의 배우다. 그러니 자신감도 있는 거다. 그때는 20대 후반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신기하고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10LOGO#>주연배우로서 출연비중이 늘어날수록 부담이 커지나.
정재영: 비중에 대한 부담은 없다. 부담감이 있는 영화는 <김씨 표류기> 같은 작품이다. 대사도 별로 없고 혼자 모든 걸 해야 하니 부담스럽다. 시나리오를 읽을 땐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연기하려니 겁이 나더라. 이걸 어떻게 해야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니까 오히려 실수를 해서 과장스러운 연기를 하지 않았나 후회된다. 좀 더 편하게 냉정을 찾아서 연기했어야 하는데 과장해서 연기하니 내가 보기엔 거슬렸다.


<#10LOGO#>오랜 기간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개인 매니저와 다닌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정재영: 팬텀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오고 난 뒤 여러 회사와 접촉도 많이 했다. 그런데 지금이 더 편하다. 혼자 다니면 불편하겠지만 매니저가 있어서 모든 게 다 해결이 된다. 영화 출연 외엔 다른 걸 특별히 하지 않으니까 그리 바쁘지도 않고 그래서 회사의 절실함을 못 느낀다. 아무래도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되면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


<#10LOGO#>드라마 출연이 한 편도 없다. 영화를 시작한 이후에는 연극 출연작도 거의 없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정재영: 안 한다기보다는 못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엔 제안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인터뷰 때마다 “안 할 생각은 없다”고 하는데도 관계자들이 잘 읽어보지 않는 모양이다. 일단 내가 낯선 현장을 겁낸다. 영화는 시나리오가 나와 있고 감독을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니 판단이 서지만 드라마는 영화처럼 시나리오가 다 나와 있는 게 아니니 판단할 수가 없다. 다들 믿고 간다고 하던데 난 뭘 보고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이 실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 겁이 난다. (웃음) 난 이틀만 밤을 새도 실신할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 현장이 더 편하다. 연극도 요즘엔 잘 안 들어온다. 하긴 해야 하는데 찾아서 할 수도 없고, 출연해야 할 영화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10LOGO#>연극 데뷔작에 출연한 1996년부터 지난 15년의 연기 생활을 정리한다면
정재영: 조급해졌다고 할까. 이 나이쯤 되면 내 연기를 봐도 어색하지 않고 이건 잘할 수 있겠다 싶은 게 있어야 하는데,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진다. 보는 눈만 높아지는데 연기의 변화는 미미하다. 50, 60대가 되면 날 찾지도 않을 텐데 그때 가면 잘하려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오히려 요즘엔 고전영화를 찾아본다. 거꾸로 이제야 영화를 공부하는 느낌이다. 다시 공부하는 시기가 온 게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알았던 걸로는 더 이상 극복이 안 된다. 이제는 공부가 필요한 시기다. 한계에 부딪힌다. 숨으려고 해도 작품을 계속해야 하고 계속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한계에 부딪힌다. <카운트다운>은 새로운 작품으로 캐릭터만 변주하는 거지 연기 자체는 업그레이드가 안 된 느낌이다. 솔직히 이젠 연기를 해나가면서 조금씩 찾는 방법밖에 없다.


정재영 “연기인생 15년, 이젠 한계에 부딪힌다”


10 아시아 글. 고경석 기자 kave@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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