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10개월 만에 최고경영자(CEO) 교체. 휴렛팩커드(HP)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때 세계 PC 시장의 공룡이었던 HP가 이제는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일(현지시간) '오라클의 미래에 HP가 있을까?(Is H-P in Oracle's Future?)'라며 일부에서 오라클의 HP 인수제안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앞서 마켓워치는 HP가 주주 행동주의자(activist)들의 분노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주주 행동주의자들은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처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사회 진출 등을 통해 기업 경영에 개입, 극단적인 경우 매각이나 분사 등을 통해 추구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행동주의자들이여 일어나라= HP는 지난 8월18일 회사의 근간이었던 PC 사업부를 분사하고 영국 소프트웨어 업체 오토노미를 103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바로 다음 날 번스타인 리서치의 토니 사코나기 애널리스트는 보고서를 통해 '행동주의자들이여, 공격에 나서야 할 때(time to sharpen your pencils)'라고 썼다.
사코나기의 공세는 계속 됐다. 9월13일 사코나기는 보고서를 통해 HP에 대한 투자자들의 분노는 자신이 13년간 기술 업종을 지켜본 중 가장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주주 행동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며 "이는 이들이 오토노미 인수 중단이나 현재 경영진 퇴출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지난달 22일, HP는 10개월 만에 레오 아포테커 CEO를 전격 경질하고 이베이의 얼굴이었던 멕 휘트먼을 새로운 CEO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사코나기는 바로 다음날 다시 보고서를 썼다. 그는 아포테커의 경영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휘트먼도 나쁜 선택이라고 꼬집었다.
사코나기는 휘트먼을 승리의 문턱에서 패배를 움켜쥐었던(Snatching defeat from the jaws of victory)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또 "내년 3월에 HP 이사회에 대한 재신임 투표가 있지만 주주 행동주의나들이나 주요 투자자들이 이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라클이 버린 오토노미 인수= HP의 수익원이었던 PC 사업부는 수익성 악화로 고전한지 오래이고 그래서 결국 HP는 PC 사업 분사를 선언했다. 시장에서는 매각 가능성을 점치며 사실상 PC 사업을 포기한 것이라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좇아 뒤늦게 뛰어들었던 스마트폰 사업도 한계를 절감, 이내 손을 들고 말았다. 향후 소트프웨어 사업에 매진하겠다며 야심차게 선택한 것이 영국 소트프웨어 업체 오토노미였다.
하지만 HP의 오토노미 인수는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고작 시가총액 60억달러에 불과한 오토노미를 거의 두배에 가까운 금액을 주고 인수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나마 HP 인수 선언 이후 주가가 폭등한 덕분이지 HP가 인수를 선언할 당시 오토노미의 시가총액은 34억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게다가 HP의 경쟁업체 중 하나인 오라클이 지난 4월 오토노미를 인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걷어찼다고 밝히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오라클은 당시 오토노미가 고용한 기술주 투자 은행가 프랭크 콰트론으로부터 오토노미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오라클은 지금 오토노미의 시가총액 60억달러도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HP의 오토노미 인수는 구글이 모토로라 모바일은 125억달러에 인수한 것 다음으로 올해 가장 큰 규모의 기술 부문 인수합병(M&A)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HP의 오토노미 인수가 이번 주말 내지 다음주 초에 완료될 것이라고 전했다.
◆오라클이 HP 인수?= 올해 들어 HP의 주가는 47% 미끄러졌다. 사업은 고전 중이고 주가도 급락하면서 월가에서는 조심스럽게 HP의 M&A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물론 주가는 급락했지만 HP의 덩치는 여전히 크다. 시가총액은 여전히 446억달러에 달한다. 스턴 어지의 쇼 우 애널리스트는 "현재 상황을 보면 HP 주가 상승을 유발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많은 주주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이지만 HP와 같은 큰 기업에 주주 행동주의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며 "돈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WSJ은 오라클이 HP를 인수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올해 주가 하락률이 8%에 불과한 오라클의 시가총액은 현재 1450억달러 정도다. WSJ은 현재 약 170억달러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끌어당길 수 있는 자금도 막대하다고 설명했다. WSJ은 매출과 영업이익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HP의 PC와 프린터 사업부가 오라클에는 분명 어울리지 않지만 래리 엘리슨 오라클 CEO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서비스 부문을 아우르는 IBM에 대적할 만한 기업을 만들고 싶어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게다가 오라클에는 두 명의 에이스가 있다며 수년간 많은 M&A를 통해 주주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준 사프라 카츠 사장과 HP를 5년간 이끌며 누구보다 HP를 잘 알고 있는 마크 허드를 언급했다. 허드는 지난해 말 성희롱 스캔들로 HP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HP 주식 약 400만주를 보유하고 있는 파나수스 인베스트먼츠의 제롬 도슨 사장 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현재 HP 투자자들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HP 이사회 일부를 교체하려는 시도가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가능하지만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HP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기관들 대부분이 매우 온건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사회에 대한 찬성 표결을 보류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대안을 찾을 것이며 이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할 것"이라며 "역량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대안을 제공해주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사코나기는 "새로운 이사진의 임명, 주주 행동주의자들의 개입, 오라클이 HP를 인수하는 희박한 가능성 외에는 단기적으로 HP 주가를 끌어올릴 호재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오라이저의 케빈 헌트 애널리스트는 "HP가 이른 시간에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 한다면 주주 행동주의자들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컴팩 인수 후 10년= 1939년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538달러로 설립한 HP는 1995년 포브스가 올해의 기업으로 선정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고전을 면치 못 했다. 데이비드 팩커드와 빌 휴렛은 각각 1996년 2001년 생을 달리 했다.
HP는 칼리 피오리나의 지휘 아래 2002년 189억달러에 컴팩을 인수하며 부활을 꿈꿨지만 약 10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먹잇감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고 있다. 피오리나는 HP 역사상 처음으로 퇴출된 CEO로 이름을 남겼다.
피오리나의 뒤를 이은 마크 허드가 비용 절감을 통해 HP의 수익성을 크게 개선시켰던 것은 HP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HP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주주 행동주의자들이 HP의 변화를 요구하며 공격에 나설 가능성에 대비해 HP는 지난주 골드만삭스를 자문사로 고용했다.
박병희 기자 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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