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김시진 넥센 감독은 투타 전환에 관대한 편이다. 벼랑 끝에 선 제자들에게 내밀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여긴다.
프로무대는 보직의 전문화가 뚜렷하다. 아마추어 시절처럼 투타를 겸비하지 않는다. 배려는 이 같은 환경에서 비롯된다. 김 감독은 “소화할 수 있는 보직이 많은 건 재능”이라면서도 “프로에 진출해 장점을 발견하는데 그만큼 애를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엽(오릭스), 추신수(클리블랜드), 이대호(롯데) 등은 성공한 투타 전향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이승엽은 1995년 삼성에 투수로 입단했지만 백인천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의 끈질긴 권유 끝에 이듬해 방망이를 손에 쥐었다.
부산고 재학 시절 투타에서 맹활약한 추신수는 2000년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면서부터 타자의 길로 걸었다. 그는 당시 선택에 대해 “미국 투수들의 볼이 꽤 빨랐다. 방망이에 욕심도 났다”고 밝힌 바 있다.
이대호는 부상이 전화위복이 된 케이스다. 2001시즌 뒤 치른 전지훈련에서 오른 어깨 부상을 입어 1군 마운드에 한 차례도 오르지 못한 채 타자로 방향을 틀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다. 채태인(삼성), 김응국(전 롯데), 이호준(SK), 장기영(넥센) 등이 그러했고 일본프로야구에서 전설로 통하는 오 사다하루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그렇다면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선수들은 어떠할까.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한 대표적인 선수는 황두성(넥센)과 권준헌(전 한화)이다.
황두성은 1997년 삼성에 포수로 입단했지만 1999년 옮긴 해태에서 투수로 전향했다. 두각을 나타낸 건 방출의 아픔을 겪고 2001년 입단한 현대에서였다. 통산 243경기에서 36승 33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3.94를 기록했다.
권준헌의 전향 계기는 이대호와 비슷하다. 1990년 3루수로 태평양에 입단했지만 오른팔을 다쳐 1999년부터 투수훈련을 받았다. 은퇴한 2008년까지 불펜, 마무리로 뛰며 19승 11패 20세이브 평균자책점 3.32를 남겼다.
두 선수가 남긴 성적은 이승엽, 이대호 등 앞선 사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뛰어드는 경우도 거의 보기 드물다. 황두성과 권준헌을 조련한 김시진 감독은 그 이유로 차별화된 훈련과 근력의 차이를 손꼽는다.
그는 “투수는 어깨, 팔꿈치, 하체 등 단련을 요구하는 부위가 많다. 변화구와 제구를 가다듬는데도 적잖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타자에게 부족한 잔 근육과 어깨 근력을 끌어올리는 일이 쉽지 않다”고 강조했다.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김 감독은 최근 세 번째 실험을 강행했다. 거포 내야수로 영입한 장영석의 투수 전향을 허락했다. 마운드는 낯설지 않다. 2009년 넥센에 입단하기 전까지 부천고에서 에이스와 4번 타자를 모두 소화했다.
정삼흠 부천고 감독은 근육의 양이 많아 잔부상에 시달릴 것을 우려, 거포로 성장할 것을 바랐다. 그러나 그 속도는 더뎠고 장영석은 끝내 김 감독과 정민태 투수코치를 찾아가 투수 전향을 부탁했다.
내용을 전달받은 김 감독은 도전을 만류했다. 140km 이상의 구속을 너끈히 던졌지만 눈앞에 놓인 길이 순탄하게 보이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장영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6월 22일 1군에서 말소돼 바로 투수 수업에 몰두했다.
빠른 성장속도로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해보였다. 한 달 만에 나선 전력투구에서 일반 투수들과 비슷한 근력을 뽐냈고 타자를 세워두고 던진 라이브 피칭에서도 합격점을 얻었다.
그 뒤 두 달간 제구와 경기운영능력을 익힌 장영석은 지난 20일 투수 수업 90일 만에 1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지난 21일 잠실 LG전에서 새로운 도전의 닻을 올렸다. 3-7로 뒤진 8회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최고구속은 145km. 볼넷 2개를 내주는 등 제구에 어려움을 겼었지만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을 적절하게 던지며 내년 선발진 진입의 청신호를 밝혔다. 그러나 장영석은 투구 내용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몸 상태를 1/3밖에 끌어올리지 못했다”며 “남은 시즌과 마무리훈련에서 더 노력해 남은 2/3를 채우겠다”고 말했다.
경기 전까지 “어려움을 알고도 타자에서 투수가 되겠다는 선수가 있어 골치가 아프다”라며 우려한 김 감독은 박수로 그의 도전을 응원했다. 경기 뒤 “첫 술에 배가 부를 수 없다”며 “투구 폼과 제구를 잡는데 힘을 쏟는다면 앞으로 다양한 보직에서 제 몫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언과 같이 관건은 노력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장영석의 미래는 밝다. 올해 그는 벼랑 끝을 경험했다. 타석에서 타율 1할7푼9리 7타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투수 전향은 고민 끝에 꺼낸 마지막 카드였다. 생존을 위한 배수진은 충분히 투타 전향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수 있다.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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