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집착을 떠나 행동하는 자는 죄에 물들지 않나니, 마치 연잎이 물에 젖지 않음 같으니라." 기원전 4세기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이다.
잘 살펴봐야 할 부분은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연잎 위에서 물방울은 동그란 공 모양을 유지하며 굴러다니거나 미끄러져 내린다. 이 과정에서 연잎 표면의 먼지까지 물방울과 함께 떨어져 내려 연잎은 언제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다. 수천년 전 사람들도 관찰을 통해 연잎에는 이렇듯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현대에서 과학으로 이어진다. 연잎의 발수성과 자정작용의 원리는 과학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1997년 독일 본 대학의 식물학자 빌헬름 바르트로(Wilhelm Barthlott)교수는 전자현미경으로 식물 잎의 표면구조를 관찰하다 먼지나 얼룩없이 늘 청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표면이 젖지 않은 채 물방울이 굴러다닐뿐만 아니라, 이 물방울이 떨어지며 먼지는 물론이고 박테리아나 곰팡이같은 물질까지 저절로 세정이 된다는 것이다. 연잎을 비롯해 갈대, 튤립등에서도 관찰된 이 현상은 '연잎효과(Lotus effect)'로 명명됐다.
연잎효과가 가능한 과학적 원리는 무엇일까. 핵심적인 것은 연잎 표면을 덮고 있는 '나노 돌기'다. 연잎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표면이 작은 솜털같은 먼지, 즉 나노돌기로 감싸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돌기 때문에 연잎의 표면장력이 엄청나게 커진다. 표면장력은 액체의 표면을 작게 하려고 작용하는 힘인데, 쉽게 말해 무수한 나노 돌기들이 연잎 표면에 닿을 수 없도록 떨어진 물방울을 지탱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또한 나노돌기는 물과 서로 겉도는 성질이 있다. 이런 성질을 물과 거리가 멀다고 해서 '소수성'이라고 부른다. 반대는 물과 가깝다는 뜻의 '친수성'이다. 물과 표면이 접촉하는 각도가 90도보다 작으면 친수성을, 이보다 크면 소수성을 띈다. 연잎의 경우 나노 돌기와 물방울의 접촉면적이 아주 작고 각도 역시 100도보다 커져 일반적 소수성보다 훨씬 강한 '초소수성'을 띈다. 또한 돌기가 기름 성분으로 코팅돼있어 이중방수 효과를 가져온다.
단순하게 생각할 땐 표면이 매끄러운 쪽이 덜 더러워지고 젖지 않을 듯 싶다. 처음에 바르트롯 교수의 주장은 '비상식적'이라며 평가 절하당했다. 그러나 산업계에서도 식물 표면에 주목하며 연잎효과는 다양한 영역에서 응용되기 시작했다. 연잎효과로 가능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비만 내려도 저절로 깨끗해지는 유리창, 음료수를 엎질러도 젖지 않는 옷, 알아서 깨끗해지고 젖지 않는 상품들을 한 번 상상해보라. 이것들 중 일부는 이미 현실화됐다.
'나노텍스(Nanotex)'라는 의류는 옷 섬유 표면에 소수성을 띄는 나노 고분자 물질로 보푸라기를 만들어 붙여 연잎효과를 구현한다. 먹던 커피를 쏟아도 손으로 털어내기만 하면 알아서 굴러 떨어진다. 뜨거운 음료를 쏟아도 방수효과가 유지되도록 한 옷감도 있다. 연잎에 섭씨 50도 이상의 뜨거운 물을 부으면 돌기의 기름성분이 녹아버리는 데다가, 나노 돌기가 물을 밀어내는 성질도 줄어들고 만다. 이와 관련해 미국 미네소타대 유양 리우 박사와 홍콩과기대 섬유직물연구소 연구팀은 테플론과 탄소나노튜브 용약에 옷감을 담그면 된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탄소나노튜브가 옷감 표면에 나노돌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미세한 홈을 만든다는 것이다.
'로터산(Lotusan)'이라는 페인트도 연잎효과를 응용한 것이다. 페인트칠한 벽이나 담장이 시커멓게 더러워진 모습을 흔히 봤을 거다. 페인트는 대체로 염료와 유기용매를 섞어 만드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먼지 등이 기름 성분에 엉겨붙어 더러워진다.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반면 '로터산'은 도포 후 유기 용매가 증발해버리고 대신 나노 돌기로 덮인 표면만 남는다. 덕분에 물만 뿌려주면 깨끗해지고, 비가 내리면 부러 물을 뿌리는 수고도 필요없다.
변기 표면에 나노 돌기를 코팅해 상품화한 사례도 있다. 찌꺼기 없이 더 깨끗한 것은 물론이다. 코팅 과정에서 은나노 입자, 산화티타늄 나노 입자 등을 섞으면 항균 기능까지 겸하게 된다. 여러 사람들이 만지는 손잡이, 청결이 중요한 병원이나 학교 등의 시설물에도 이런 아이디어를 접목시킬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전자기기에 연잎효과를 접목시킨 사례도 등장했다. 포스텍 화학공학과 용기중 교수와 박사과정 이승협씨 연구팀은 나노소재를 이용한 초발수기술을 전자소자 표면처리에 응용해 물에 젖어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소자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전자소자 표면에 연잎 위 돌기처럼 나노선을 덮고 화학물질에 담가 코팅한 것이다. 이 화학물질이 연잎 돌기의 기름성분 역할을 한다. 기존의 방수 전자제품들은 물이 기기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하는 '패키징' 기술을 이용해왔다.
연구팀은 차세대 메모리소자로 각광받는 R램에 물을 떨어뜨려도 전원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확인했다. 앞으로 물에 약한 메모리소자 등 다양한 전자소자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용 교수는 "나노선이 물방울을 밀어내 소자가 젖지 않는다"며 "패키징을 해 놓더라도 물이 조금 새어 들어갈 수 있는데, 이 기술을 이용하면 더 안정적"이라고 덧붙였다.
김수진 기자 s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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