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저 새침한 도시여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한은정은 KBS <서울 1945>를 통해 불쑥 화장기 없는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서 그녀가 차분하고 강단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무렵, 다시 한은정은 KBS <구미호 : 여우누이뎐>으로 새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생존을 위해 눈빛을 숨기고 모성 앞에서 단장의 울음을 쏟아내던 구미호는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연약한 인물이었고, 두 개의 얼굴을 분리하지 않은 채 연기해 낸 한은정은 점점 대중들이 알고 있는 그녀의 이미지로부터 멀어졌다. 심지어 그녀는 단막극 <사백년의 꿈>에서는 1인 2역을 통해 두 얼굴을 따로 그려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한은정이라는 배우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하자, 그녀는 유쾌하게 웃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봐요. 점점 제가 누구인지 알려드리는 게 저에게 주어진 숙제이고, 저는 그 과정이 즐거워요. 이미 다 알면 재미없잖아요.”
영화 <기생령>에 대해서도 그녀는 공포와 다른 지점을 이야기 한다. “제가 연기한 서니는 사랑으로 아이를 구출해 나가는 인물이에요. 공포도 있지만, 슬픈 정서가 기본으로 있는 영화죠.” 그리고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조금 더 전달 하고자 한다. “연기적인 부분에서 성격이나 내면적인 환경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일찍 철이 든 편인데, 그런 부분이 일치하는 역할이 대개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녀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지점은 대중들이 인간 한은정과 꼭 닮은 배우 한은정을 알게 되는 어느 날이다.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결국 저는 배우니까 연기로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근차근 가다 보면 끝내 도달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녀가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로 꼽은 다섯 편의 영화는 그 시간에 대한 힌트이기도 하다. 아직 그녀가 보여주지 못한 다음의 얼굴들은 언제쯤 한은정을 만나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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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냉정과 열정사이> (Calmi Cuori Appassionati)
2001년 | 나가에 이사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멜로영화잖아요. 몇 년에 걸쳐서 여러 번 본 영화기도 해요. 저도 이렇게 대중적이면서 오랫동안 사랑 받는 사랑 이야기를 꼭 해보고 싶네요. 그리고 어차피 이어질 사람들은 결국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세계관도 제 생각과 맞아떨어지고요. 주인공이 진혜림인데, 깍쟁이처럼 도시적인 외모를 가지고도 절절한 멜로를 보여주잖아요. 저도 외모가 차가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런 평가를 극복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이탈리아에 가 본 적 없는 사람들이라도 두오모 성당의 아름다움을 잘 안다. 특히 <냉정과 열정사이>를 본 사람이라면 그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냉정함으로도 막을 수 없고, 열정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화면과 함께 담아낸 이 영화는 이제 이 시대의 고전이 되었다.
2. <원스> (Once)
2006년 | 존 카니
“음악영화에 특별히 흥미가 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순수함만큼은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어요. 평생 순수한 사랑을 몇 번이나 해 보겠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계산적으로 사랑을 생각하기 쉬운데, 사랑은 순수해야 맞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가진 것 없이 마음만으로 사랑을 이루는 <원스>의 인물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소박하지만 이 영화의 사랑은 설득력이 있어요.”
<원스>의 포스터는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남루한 두 남녀가 거리에서 서로를 응시한다. 서로의 존재를 통해 음악을 완성하고, 음악을 통해 사랑을 깨닫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일생에 단 한번 올 것처럼 깊은 교감을 바탕으로 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담담하고 잔잔하게 그들을 응시한다. 그리고 음악은 단단하게 영화를 감싼다.
3. <호우시절> (A Good Rain Knows)
2009년 | 허진호
“네, 이런 사랑을 해보고 싶어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평생 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사랑이라고 봐요. 그래서 멜로 영화중에서도 아련한 느낌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호우시절>은 그런 점에서 참 예쁜 영화예요. 같은 맥락에서 <만추>도 정말 좋아해요. 저는 아무래도 격정적인 사랑보다는 오래가는, 조용한 사랑에 더 끌리나봐요.”
사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시작되기 직전일지도 모른다. 스치는 눈길, 떨리는 목소리, 어색한 공기를 말랑하게 만들어 주는 웃음. 과정의 표정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허진호 감독의 장기자랑과 같은 영화 <호우시절>은 오래간만에 재회한 남녀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그리는 영화다. 마치, 때를 맞춰 내리는 비처럼 쏟아지는 이 감정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4. <지아> (A Gia)
1998년 | 마이클 크리스토퍼
“안젤리나 졸리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예요. 외모도 정말 아름다운데 연기도 잘 하잖아요. 그리고 다양한 작품을 소화한다는 점에서 특히 존경스러워요. 사실 저는 <툼레이더>도 정말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배우로서 연기하기 어려운 건 오히려 <지아> 같은 작품이었을 거예요. 정말, 연기가 대박이거든요! 진짜 안젤리나 졸리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랍니다.”
불꽃에 비유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1986년 사망한 모델 지아 마리 카란지 역시 그런 부류다. 톱 모델로서 화려한 삶을 살면서도 늘 사랑을 갈구하던 그녀는 결국 마약 중독 상태에서 에이즈로 죽음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의 삶을 요약한 <지아>는 강렬한 비극으로 그녀를 추모한다.
5. <블랙스완> (Black Swan)
2010년 | 대런 아로노프스키
“일종의 스릴러잖아요. 정말 몰입해서 봤어요. 주변에서는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는 아무래도 배우라서 그런지 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연기 자체도 어렵지만, 배우의 엄청난 연습량이 눈에 보였거든요. 영화 자체도 물론 인상적인데, 나탈리 포트만이 그 배역을 위해서 고생하고 준비한 과정 자체에서 감동을 받기도 했구요. 대역이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 발레리나처럼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겠어요.”
흰 백조를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는 뉴욕 발레단의 니나는 검은 백조를 연습하며 자신의 한계를 직시한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 상황을 돌파하고 싶은 그녀는 점점 자신이 만든 고뇌의 환상 속에서 길을 잃는다. 가장 완벽하게 통제된 연기로 가장 통제 불가능의 인물을 만들어 낸 나탈리 포트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주 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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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한 배우의 흔적에 감동한다는 그녀는 스스로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이기도 하다. 구미호가 되어 산을 뛰어 다니고, 공포 영화 안에서 어려운 장면을 소화 하면서도 그녀는 한 번도 힘든 줄을 몰랐다고 자신한다. “작품이 끝나고 나면 위병이 나 있고, 살이 빠져있어요.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촬영 할 때는 서너 시간밖에 못자도 피곤하지가 않더라구요. 끝! 하면 그제서야 아프고 지치는 거죠. <기생령>도 끝나고 나서야 좀 앓았죠.”
어떤 배우는 등장부터 눈을 사로잡지만, 한은정은 천천히 가더라도 오래오래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침 심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임을 자신한다. 그런 그녀가 선택한 방식이 집중과 인내라는 점은 멀리 보면 다행스럽지만 배우 개인에게는 쉽지 않은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은정은 걱정 말라는 듯 말한다. “스트레스도 받지만 다 풀면서 살아요. 그리고, 어떻게 다 풀면서 살겠어요. 그렇게 가는 거지.” 모르는 여자 한은정을 알아가는 일이 기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아는 여자, “시행착오가 뒤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믿는 여자의 성장은 좀 기다려 줄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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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윤희성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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