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효진 기자] '정치란 가치의 권위적인 분배다.' 정설이나 정답이 거의 없는 정치학계지만, 데이비드 이스턴 전 시카고대 정치학 교수의 이 말은 비교적 확고한 정답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쉽게 말하면 '나눠갖는 일'이 곧 정치란 얘기다. 이스턴 전 교수의 말처럼 누구보다 깊숙하게 '정치'에 몸 담은 사람이 있다. 보다 효과적으로 나눠가지려 부단히 애쓴다는 그다. 그가 나눠가지려는 것은 가급적 많은 가치의 융합에서 비롯된 창조적 지식이다. ☞관련기사:'물리+인문', '수학+생명과학'.."미래기술 선도"
스티브 잡스는 평소 "내 지식의 원천은 학교에서 배운 IT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이라고 공언해 왔다. 융합과 창조를 바탕으로 한 '한국형 스티브 잡스'를 길러내보겠다는 이 사람. '정치 안 하시느냐'는 질문에 "이미 정치하고 있는데 자꾸 정치 안 하느냐고 물으면 곤란하다"며 웃는 그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융합 전도사'로 막 새출발을 한 안철수(사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스팀교육(STEAM=과학ㆍ기술ㆍ인문ㆍ예술 등을 복합시킨 교육방식)' 바람이 불며 융합과 창조의 가치가 주목받는 이 때, 안 원장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유난히 울림이 컸다. 이런 안 원장을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안철수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금은 융합인재 길러낼 때… 기업 아닌 학교서 사람들의 창의력 길러줄 터=안 원장은 지난달 초 대학원 교수 약 20명과 처음 회의를 가졌다고 했다. 대학원 운영에 시동을 걸었다는 말이다. 갖가지 구상으로 머리가 복잡한 때이지만 그래도 꼭 짚고넘어갈 부분이 있었다. 무엇때문에 '업계'가 아닌 대학을, 그것도 공공의 영역에 속한 서울대를 택했느냐는 것이다. '국립대 출신 잡스'의 이미지보다는 '현장 출신 잡스'의 이미지가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더 쉽게 떠오르는 탓이다. 그간 축적한 지식을 기반으로 산업 현장에서 인재와 기술개발에 나서도 시원치 않을 판에 국립 교육기관의 울타리로 들어가 월급쟁이 생활을 하기로 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때로는 비판의 여지가 되기도 하는 이 점을 안 원장은 '영향력'과 '효율성'으로 설명했다.
안 원장은 "개인의 창발성을 끄집어내려면 공적영역보다는 사적영역에 몸담는 게 더 나을 것이란 지적도 인정한다"고 했다. 하지만 "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인생이 바뀌어 창조적 인재로 거듭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는데 업계로 이미 진출한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어려웠다. 기술을 가르치는 데 주력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기술을 이식하는 것보다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시켜주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이야기다.
안 원장은 또 "학자 신분일 때는 학교 밖에 있을 때보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해도 받아들여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면서 "중소기업 사장으로 국회의원한테 얘기하는 것과 교수로서 얘기하는 것은 달랐다. 사회적 차원에서 중립적으로 받아들여주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또 "차라리 안철수연구소에 있으면서 능력을 발휘하는 게 좋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한 회사의 이익보다는 더 많은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되도록 많은 젊은이들에게 '창의와 자율의 기반'을 닦아주기 위한 수단으로 서울대행을 택했다는 설명이다. 바쁜 일정을 쪼개 틈나는대로 지방 곳곳을 돌며 강연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실패 용납않는 문화 바꾸고 교류 가능한 학제 운영 선보일 것=안 원장이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또 있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그것이다. 안 원장은 "40~50년 전 우리나라가 정말 가난할 때 발전 방향은 다른 나라가 이미 일궈놓은 것 중 조금이라도 성공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에 모든 것을 걸어 쫓아가는 '패스트 팔로어'였다"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면 리스크가 부담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국 반세기만에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됐는데 이 과정에서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가 만들어졌다"면서 "이런 점이 젊은이들의 도전을 가로막고 억누르는 요인이다. 한 번 실패하면 재기할 기회를 안 주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바로 이 점이 그를 젊은이들, 학생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됐다는 것이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가 선택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이 곳에서 안 원장이 그리고 있는 밑그림은 역시 '융합'과 '창조'였다. 그는 "고전적인 학문 분류 방식으로는 사물이나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다 보지 못한다"면서 "이렇기 때문에 융합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은데, 결국 융합이란 모든 갈래의 학문을 본래의 자연상태 그대로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가 아닌가 싶다. 이 점을 실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엄연히 존재하는 학과들을 제도적으로 융합해 성역 없는 상호교류가 가능한 학제로 재편성하는 게 운영상의 목표라고 안 원장은 말했다.
◆연구보다 교육중시… 소통으로 융합인재 기르겠다=그가 새 직장에서 달성하려는 목표는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안 원장은 "카이스트 시절 제 담당이 아닌 학생들이 저를 찾아와 상담하면서 눈물 흘리는 일이 잦았다"면서 "담당 교수의 태도나 상담 여건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저를 찾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학생과 교수 간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는 바로 이 점이 학생과 교수의 '윈(Win)-윈(Win)'을 가로막는 요소라고 판단했다.
안 원장이 꼽은 원인은 대학의 교수평가 방식이다. 안 원장은 "대부분의 대학이 교수를 연구실적에 기초해서 평가하는데, 이렇게 되면 교수는 학생과의 소통을 뒤로한 채 연구실적에만 매달려야 하고 이로인해 대학이 단순한 연구기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면서 "만 명의 먹거리를 만들되 독식하지 않는 인재를 기르려면 교수들이 학생을 방목하지 않고 친밀하게 챙겨주는 교육기관으로 바로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정치가 가치를 나누고 가능성을 배분하는 과정이라면 저는 이미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라며 "스티브 잡스는 사실 교육이 필요 없던 타고난 사람 아닌가. 잡스의 10%밖에 안되는 사람들을 50%까지라도 끌어올리는 것이 교육"이라고 말했다.
대담=황석연 사회문화부장 skyn11@asiae.co.kr
정리=김효진 기자 hjn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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