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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블로그]현충일이 생각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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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안준영 기자] 필리핀 하면 우선 푸른 바다와 야자수가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해변이 떠오를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난, 부패, 타락 같은 전형적인 후진국의 어두운 이미지들이 오버랩될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은 우리에게는 이상향이었다.


스페인과 미국, 일본의 제국주의 치하를 경험하고 1946년 독립한 필리핀은 미국과의 직교역으로 일본에 이은 아시아 2위의 부국으로 올라섰다.

1960년 초반 한국의 국민소득이 100달러를 밑돌때 필리핀은 세배가 넘는 300 달러에 달했다.


막강한 경제력과 미국과 영국에 이은 세계 3위의 영어공용국이라는 잇점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던 필리핀은 1966년 세계은행 (IBRD) 의 아시아판인 아시아개발은행 (ADB) 을 수도인 마닐라로 유치하기도 했다.


필리핀은 가난에 찌들던 한국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63년 완공된 한국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은 필리핀의 원조와 기술로 건설됐다.


보릿고개를 벗어나게 한 통일벼도 필리핀 미작연구소의 도움아래 개발됐다.


하지만 필리핀과 한국은 더 깊숙한 인연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은 8번째 국가로 참전했다.


당시 유엔총회 (NATIONAL ASSEMBLY) 의장은 필리핀 사람인 카를로스 로물로였다.


그눈 회원국들의 유엔군을 파병을 독려하는 한편, 총 7420여명의 전투병을 파병, 전사자 116명, 실종 16명, 부상자 299명 등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냈다.


필리핀 500페소짜리 지폐에는 ‘코리아’란 단어와 6. 25전쟁기사 내용이 삽화로 소개돼 있다.


앞면에는 6. 25때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필리핀의 영웅, 베니그노 니노이 아퀴노 전 상원의원 초상화가, 뒷면에는 ‘필리핀 기갑부대 38선 돌파’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그 당시 절박한 한국 실상을 반영하듯, 외국 군인들에게 ‘꽃 파는 한국 소녀, 구걸하는 한국 소년’ 그림이 담겨 있다.


물론 이는 필리핀 현대사에서 가장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중 한명인 아퀴노 전 상원의원을 기리기 위해서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아직도 필리핀이 한국전쟁에 단지 군사를 파견한 것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협조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수교 60여년이 지난 지금, 필리핀을 찾는 관광객의 4분의 1은 한국인이고, 필리핀에 정착한 한국인 교포도 12만명에 달한다.


또 한국에 체류중인 필리핀 노동자도 4만명에 이르는등 외형상 두나라는 가까워졌다.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우리는 돈의 잣대로 은근히 그들을 무시하거나 깔보아온것이 사실이다.


현충일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현충일 추모 주간만큼은 필리핀, 태국 , 남아공, 콜롬비아등 한국전쟁 참전국이면서도 우리가 잊고 있었던 나라들의 희생정신을 한번쯤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안준영 기자 daddy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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