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현준 기자] "저희는 가히 '전쟁'이라고 할만큼 치열한 싸움을 경쟁사와 벌여왔습니다. 부채비율을 감안하면 현대 오일뱅크는 생사의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년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난 26일 밤 서울 서초구 공정거래위원회 6층 심판정에서 울렸다. 주인공은 현대 오일뱅크의 박병덕 상무였다. 정유사 간에 담합을 벌였다는 의혹에 그는 울컥했다. 검사역할을 하는 공정위 심사관들이 현대 오일뱅크에 1055억51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려했기 때문이다.
공정위가 첫 공개한 전원회의였던만큼 그 동안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던 일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S-오일은 담합을 벌이지 않았다면서 주유소 사장의 확인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공정위 심사관들이 해당 주유소 사장이 제출한 다른 문서와 서명 필적이 다르다고 위조의혹을 제기하자, S-오일은 "명목상 사장일 뿐이고, 또 관리소장이 사장의 위임을 받아 대신 서명했다"고 한 발 후퇴했다. 이마저도 위임장 없이 한 일이란 게 들통났다. S-오일을 대리한 김앤장은 당황한 표정을 짓다 "S-오일이 제출한 자료였다"고 서둘러 매듭지었다.
SK는 증거를 통해 담합이탈을 특정할 수 없자, 경제적 분석 모델을 제시해 증명하려했다. 김종만 국민대 경제학과 교수와 김대욱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가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SK네트웍스가 워크아웃 기간인 2004년이후부터 시장에 구조적변화가 있었다며 당시에 담합을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미강 공정위 사무관이 같은 데이터로 분석하자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SK는 전원회의 시작 직전에 다른 데이터로 분석한 자료를 제출했지만 이것도 틀린 자료라는 게 걸렸다. SK는 자료가 잘못됐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최 사무관은 "미필적 고의는 아니고, 단순 실수로 보인다"고 했다.
반면 자진신고를 한 GS칼텍스는 차분하게 "그 동안 공정위의 조사에 충실히 협조했다"고만 밝혔다. GS칼텍스는 과징금을 100%면제받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정유사들의 소명을 들은 뒤 SK에 1379억원을, S-오일에 45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키로 했다고 이틀날 발표했다. 박 상무가 울컥했던 현대 오일뱅크에는 744억1700만원의 과징금만 부과됐다.
박현준 기자 hjun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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