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벌 역사상 왕자의 난과 시아주버니의 난은 있었어도 며느리의 난은 없지 않았습니까.” MBC <로열 패밀리>에서 JK그룹 변호사 한지훈(지성)은 공순호(김영애) 여사를 향해 자신감에 찬 말투로 말했다. 이것은 작가들의 자신감을 담은 대사인지도 모르겠다. 한국 드라마 역사에서도 며느리의 난이 갈등 구조의 가장 중요한 축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난의 최종 고지가 시어머니인 경우는 더더욱. 공순호와 김인숙(염정아)이 서로를 바라보며 만들어내는 팽팽한 장력은, 두 배우의 연기적 에너지는, 탁월하기 이전에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40대 여배우도 주인공을 할 수 있는 바뀐 세상”(염정아)이 필요했다. 누적된 변화는 어느 순간 새로운 지평을 연다. 앞서 언급한 장면 이후 김인숙이 공순호를 향해 내뱉는 말은 그래서 흥미롭다. “모두를 휘두르고 싶은 어머니의 욕심이 의심을 키웠고, 그 의심이 결국 어머닐 지옥으로 끌고 가고 이 정가원을 지옥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지옥에서 저 같은 괴물이 탄생했어요.” MBC <욕망의 불꽃> 속 윤나영(신은경)과 김태진(이순재)의 대립이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부딪힘이었다면, 김인숙이라는 괴물은 마치 에일리언처럼 공순호라는 숙주 안에서 자라난다. 숙주의 배를 찢고 나와야만 새로운 생명체는 세상에 등장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여배우라는 존재의 지평은 그런 방식으로 넓혀져 왔다.
김영애, 여배우의 새로운 장을 열다
이것은 “힘든 결혼 생활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연기였다”고 말하는 김영애의 시대가 “일을 하니 부부 사이가 더 애틋해졌다”고 말하는 염정아의 시대로 바뀌는 과정이기도 하다. 미녀 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7, 80년대의 김영애는 정작, 영화기자상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절정>에서 가슴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온몸을 웅크리는 수줍은 여배우였고, 아이가 자신의 베드신이 있는 영화를 볼까 두려워 한동안 영화 활동을 끊은 불안한 엄마였다. 작품 바깥의 보수적 윤리 기준이 연기활동의 범위마저 제한하는 시대, 전성기의 여배우는 “숨구멍”을 찾아 카메라 앞을 찾는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주위의 시선과 스스로 내면화한 자기검열과의 싸움으로 확보하는 공간이다.
SBS <형제의 강>이나 SBS <모래시계>, KBS <야망의 전설> 같은 작품을 두고 마치 ‘국민 엄마’가 갑자기 공순호로 180도 변신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미 그는 1986년작 영화 <겨울나그네>에서 악독한 표정 한 번 보여주는 일 없이 주인공 민우(강석우)를 타락시키는 기지촌 대모 역할로 미녀 배우 너머의 지평을 확보했었다. 아무개의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서의 개성을 온전히 갖춘 엄마는 그렇게 등장할 수 있었다. 후배 정성모가 “너무 자연스러워 연기하지도 않은 것 같다”고 말했던 <모래시계>에서도 흔한 생활 연기 패턴의 어머니가 아닌, 요정(料亭) 주인으로서의 퇴폐적 느낌과 강직한 어머니, 빨치산 남편을 가슴에 묻은 로맨티스트가 결합된 모습이었다. 특히 그의 죽음 장면은 다 큰 아들을 둔 어머니가 처연하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줬다. 치열하게 자신의 길을 달려온 여배우는 40이 넘어 비로소 중년 여배우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닦은 개척자도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 새로운 과거를 만들 수는 없다. 그건, 뒷사람들의 몫이다.
염정아, 그 장을 이어받다
염정아가 “이번 기회를 잡지 못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택한 작품이 김영애와 함께 한 <형제의 강>이라는 건 재밌는 우연이다. 그가 연기했던 소희 자체가 파격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 다만 미스코리아 출신 미녀 배우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소희, 그리고 그와는 전혀 다른 악역인 SBS <모델>의 박수아를 오가는 강행군을 선택했다는 건 주목할 만하다. 김영애를 비롯한 과거의 여배우들도 치열한 20대를 보냈다. 하지만 “배우가 뭔지는 모르지만” 예쁘니 도전해보라는 말에 덜컥 배우가 됐던 김영애와 달리 “이거(연기) 외에는 다른 건 생각도 안했던” 염정아에게 미녀라는 타이틀은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여전히 미녀이기에 데뷔하게 됐지만 처음부터 연기자로서의 자의식을 갖춘 세대의 등장. 그 자의식이 역시 미스코리아 출신에 역시 김영애가 출연했던 <모래시계>의 고현정처럼 빠르게 가시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의지가 있다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연기력 역시 누적될 수 있다. 김인숙을 두고 흔히 말하는 염정아의 재발견은, 정확히 말해 틀린 표현이다. 20여 년 동안 특별한 커리어하이를 찍지 못한 배우가 어느 순간 김인숙을 연기해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의 정점을 믿으며 20여 년 동안 노력한 배우가 김인숙을 만난 것뿐이다. 그리고 김영애를 비롯한 여배우들이 중년 이후에 한 번 더 발전하는 걸 확인했던 사람들은 조금은 여유 있게 또 다른 그녀들의 성장을 기다려주었다. 배우 본인은 “40대 배우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KBS <황진이>의 윤선주 작가는 56세의 김영애를 백무 역으로 고집했고, 그 이듬해 염정아는 영화 <오래된 정원>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대체하기 어려운 여배우가 만들어낸 반짝이는 순간
하지만 지붕 위에 오르면 사다리는 버려야 한다. 그래야 김영애를 비롯한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그녀들 역시 자기만의 지평을 열 수 있다. “지성과의 키스신을 보고도 남편이 아무렇지 않아 하는”(염정아) 환경은 1954년 윤인자의 <운명의 손>에서의 첫 키스신 이후 김영애를 비롯한 배우들이 보수적 시선을 이겨내며 확보한 지분이다. 하지만 염정아는 가정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발 더 나아가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멜로의 한 축을 담당한다. <로열 패밀리>에서 보여줬던 수많은 감정의 층위는 한지훈과 엄기도(전노민)를 대하는 남자 대 여자의 미묘한 기류를 통해 훨씬 복잡해질 수 있었다. 이건 연기력과 동안 피부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차이다. 스스로 좋은 엄마이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삶의 산소를 찾아 구도하듯 연기하던 김영애가 “나이 70이 되도 여자 느낌이 남아있을 것 같은데, 그게 진해서 추해질까 걱정”한다면, 처음부터 욕망을 쫓아 연기자가 된 뒤 연기와 가사 모두 즐기듯 누리는 염정아는 “선생님(김영애) 나이가 되어서도 내 색깔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연기에 ‘올인’해 왔지만 평범한 여성의 삶과 연기자의 삶 사이에 여전히 괴리를 느끼는 여배우와 일을 통해 가정의, 가정을 통해 일의 즐거움을 느끼는 여배우의 차이. 예나 지금이나 “여배우들은 30대 후반쯤부터 거울을 보며”(김영애) 나이 먹음을 실감하겠지만, 40대 여배우가 멜로를 비롯한 모든 장르에서 주인공을 할 수 있는 건, 분명 그 세대만의 성과다.
그래서 공순호가, 김인숙이, 그리고 며느리의 난이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60대의 김영애와 40대의 염정아를 기다려야했다. 남편 문제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은 채 JK그룹을 이끈 공순호는 힘든 개인사를 연기로서 극복해온 김영애를 통해, 공순호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김인숙은 일상과 연기 모두 거침없는 염정아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 둘의 부딪힘을 통해 고부 갈등이라는 그토록 오래 반복되어온 테마는 비로소 두 여성 주체의 신념 대결이 되었다. 이것은 고현정의 미실이 그랬던 것처럼 대체하기 어려운 여배우가 만들어낸 반짝이는 순간이자, 여배우의 지형도를 바꾸는 순간이다. 세대를 이으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로열 패밀리’란 바로 이들을 위한 칭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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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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