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LOGO#>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드라마는 어떤 소재든 전개와 함께 서로 굉장히 사랑하는 주인공들의 러브라인이 기승전결을 갖는 편인데 <로열 패밀리>의 엄 집사와 인숙, 지훈과 인숙, 지훈과 현진의 관계를 모호하고 미묘하게 처리한 이유가 있다면.
김영현 : 사실 드라마 작법에서 ‘멜로’는 인간 사이 감정의 흐름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남녀간의 사랑이나 삼각관계만을 멜로에 한정짓는 게 좀 불만이다. 사실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남녀 간의 사랑으로 한정시켜 놓으면 이야기 자체가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설레는 감정, 위로하는 감정, 책임지는 감정 등 인생의 국면마다 달라질 수 있는데 언제나 남녀로 설레는 감정 상태만이 꼭 맞는 멜로인가 라는 의문이 있다. 물론 그 미치도록 설레는 감정을 나도 좋아하기 때문에 <파리의 연인>이나 <시크릿 가든> 같은 로맨스 드라마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보고 싶어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멜로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항상 고민이다. <대장금> 때도 남녀의 로맨스에 대한 강박 때문에 장금이(이영애)와 중종(임호)을 붙이려고 엄청 노력했지만 스토리와 캐릭터가 잘 붙지 않았다. 결국 그것마저 잘 표현해 내는 게 내 작가로서의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권음미 : 5부에서 지훈이 CCTV 앞에서 인숙에게 키스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원래는 “이건 진심이에요”라는 대사를 넣었다가 편집 과정에서 빼 달라고 했다. 4부까지 방송됐을 때 사람들이 헷갈려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나는 어쨌든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썼다. 다만 인숙이 처한 상황이 너무 극단적이니까 표현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 기획안에 쓴 대로 인숙을 ‘신이자 여자이자 어머니’로 보고 있다는 게 지훈의 감정이었다.
<#10LOGO#> 하지만 지훈이 인숙의 정체를 알아가며 강한 배신감을 느끼다가 10~13회의 전개에 비해 다시 돌아가는 14회에는 어떤 결정적인 계기나 밀도 높은 감정적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권음미 : 나는 지훈이 인숙에 대해 맹목적인 신뢰를 갖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원래 대본에는 기도가 “인숙이 조니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 지훈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지금 그 말이 나한테는 신기루일지도 모르지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본 것 같다”는 대사가 있었다. 뭔가를 확실히 발견해서 인숙에게 돌아온 게 아니라, 그 한 마디를 키(key) 삼아서 믿겠다는 의지로 돌아온 거다. 물론 이 사실을 빨리 밝혀서 시청자들에게 인숙이 찌르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시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웃음)
<#10LOGO#> 그런데 시청자들이 김인숙을 응원했던 중요한 이유는 그가 착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는 인간이고, 착한 데 대한 반대급부로 JK 그룹을 얻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는 것 같다. 각자 어떤 인간상을 좋아하나.
박상연 : 관습적인 선악구도에서 벗어나는, 모호한 캐릭터를 좋아한다. 만화 <열혈강호>에 나오는 “세상에 악한 사람은 없어. 그냥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갈 뿐이지” 라는 대사가 정말 맞는 것 같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허구의 캐릭터지만 그들이 더 진짜 같을 때 매력적이다. 난 예술이든 인간이든 본질은 ‘모호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덕여왕>의 비담(김남길)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빨리 관계를 끊어야겠지. (웃음)
김영현 : 비슷하다. 모호하다는 건 ‘이면’을 뜻하는데, 드라마에서도 이면이 나와야 재미있을뿐더러 내가 다른 드라마를 볼 때 가장 집중하는 부분도 인간의 이면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솔직하고 분명하고 책임감 강한 인간을 좋아한다.
권음미 : ‘존엄’이라고 하면 약간 부담스럽지만 ‘dignity’라고 하면 조금 더 와 닿을지 모르겠는데, 극한 상황에서도 ‘dignity’를 지키려는 인간을 좋아한다. 그건 재벌이어서, 혹은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의지에서 생기는 것 같다. 자기가 처한 운명보다 나은 인간이고자 하는 욕구에서 매력을 느낀다. 인숙이 어느 순간에는 악행을 저지르곤 하지만 공순호에게 꼬박꼬박 ‘어머니’라 부르고 예의바른 말투를 사용하는 것도 그런 느낌을 살리기 싶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 헌장’이나 ‘크리에이터 강령’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10LOGO#> 앞서도 말했듯 드라마 시장은 계속 변하고 있고, 그 시대적 변화를 민감하게 캐치하지 못하는 작가들이 도태되기도 쉬운 상황이다. 매번 작품마다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방식을 꾸준히 바꿔오고 있는데 어떤 고민들을 하나.
김영현 : 회의도 많이 하지만 나와 박 작가는 처음 친해졌을 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나눈다. 우리는 미디어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그런 주제들을 시대상과 맞춰 가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사실, 일하기 싫어서 그런 얘기를 할 때도 있다. (웃음)
박상연 :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며칠 뒤 택시 기사 분이 “에휴, 그놈의 것 그냥 터지면 좋겠어요” 라고 하시는 걸 듣고 대중은 모든 것을 ‘이야기’로 소비하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현실에서는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그 현실과 직접 마주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른 새로운 구성점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야기가 늘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도태되는 걸 경계한다. 작가란 세상을 향해 할 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나도 할 말이 떨어질 수도 있고 그럼에도 써야 하는 때가 올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할 말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지난 3년간 너무 바빠서 인풋이 별로 없었다. <선덕여왕> 때 이미 그런 위기감을 느꼈고 계속 고민하고 있다.
<#10LOGO#> 그럼에도 자신의 작품을 쓰는 것 외에 크리에이터로 드라마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박상연 : <히트>로 김 작가님과 공동작업을 한 이후, 성과와 상관없이 과정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그걸 시스템하고 싶은 마음에 덜컥 회사를 만들었다. 사실 회사라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으면 회사가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의지를 갖기 때문에 계속 굴러가게 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다. (웃음)
김영현 : 후배 작가에 대한 책임감도 어느 정도 있다. 함께 작업했던 보조 작가들이 앞으로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또, 나나 박 작가에게는 50부작 정도의 긴 사극을 많이 맡기는데 현대극, 미니 시리즈라는 장르를 크리에이팅 하며 배우거나 얻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10LOGO#> 크리에이터로서 <최강칠우>와 <로열 패밀리>를 함께 작업했는데 어떤 고민을 했나.
김영현 : 우리가 원래 작가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쓰고 싶은 대사가 생각나고 엔딩이 떠오른다. 하지만 크리에이터는 집필작가가 써온 판단과 방향을 두고 이야기를 해야지 우리가 쓰고 싶은 대로 가려면 이미 그 앞에서부터 포석을 다시 깔아야 하니까 작가로서의 입장을 감추고 억눌러야 한다.
박상연 :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와 거리를 조절해야 한다는 게 작가로서는 굉장히 낯선 경험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고, 마음 같아선 ‘크리에이터 헌장’이나 ‘크리에이터 강령’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웃음)
김영현 : 어쨌든 크리에이터의 역할로 중요한 건,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작가가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런칭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부분의 세팅에 도움을 주는 거다. 나도 신인 작가 때 굉장히 많이 흔들리고 뭘 썼는지도 몰랐을 때가 있다. 연출자나 제작자들이 ‘이거 재미없으니까 고쳐 주세요’ 라고 해서 고친 것들이 방송되고 나면 이미 캐릭터와 스토리 방향이 되어 있는데 쓸 때는 미처 모른다. 어느 작가든 자기 작품의 문제점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문제를 초반부터 보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훨씬 해결이 쉬워질 거다. 방송 1주일 전, 시청률이 정체됐을 때, 시청률 떨어졌을 때 정말 별별 얘기가 다 나오고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으로 미칠 지경이 된다. 그런데 누구 한 명이라도 그 시점에서 ‘괜찮아. 지금 잘 하는 게 중요해’ 라고 말해줄 필요가 있다. 내가 신인 시절 듣고 싶었던 말이고 그 덕분에 다음을 쓸 수 있었으니까. 굉장히 감정적인 요인이긴 한데 결국 드라마란 감정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을 주목하라”
<#10LOGO#> <로열 패밀리> 이후의 계획은 어떤가.
권음미 : 아직 <로열 패밀리>도 정리가 다 안 돼서, 앞을 생각하면 두려울 뿐이다.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지 아직 감이 안 잡힌다. 일단은 보조 작가들과 지중해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어쩌면 코르시카에서 인숙과 지훈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웃음)
<#10LOGO#> 9월 말 방송 예정인 SBS <뿌리 깊은 나무>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쓰면서 어떤 면에 재미를 느끼나?
김영현 : 4부 정도까지 대본이 나왔고 <바람의 화원> 장태유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 <선덕여왕>에서는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권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살짝 나왔다면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문자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으며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써 보고 싶다.
박상연 : 세종(한석규) 캐릭터가 재밌을 거다. <선덕여왕>에서는 미실(고현정)이라는 캐릭터를 만들며 시청자들도 어느 정도 미실의 말이 맞다고 여기게 하고 싶었던 것처럼,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훈민정음을 만들려는 세종의 반대파가 갖는 논리에 좀 더 공을 들여 보고 싶다. 이미 세종이 가지고 있는 논리는 너무나 공고하니까.
<#10LOGO#> 혹시 <뿌리 깊은 나무> 이후의 계획도 잡혀 있나?
김영현 : MBC에서 방송될 50부작 드라마가 하나 더 있다. 아이템은 미정이다.
박상연 : 그동안 같이 일했던 보조작가가 준비 중인 작품의 크리에이터로도 참여할 예정이다.
<#10LOGO#> 최소한 향후 2년 가량의 인생이 다 저당 잡혀 있는 셈이다. (웃음)
김영현 : 이 나이까지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건 감사한 거라고 마음을 다잡다가도 가끔은 ‘이게 행복한 건가?’ 라고 고민한다. (웃음)
박상연 : 오죽하면 톨스토이가 “즐거운 일을 찾지 말고 일에서 즐거움을 찾아라” 라고 했겠나. 그 말을 듣고 이 사람도 오죽 일하기가 싫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10LOGO#>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얘기 한 번 해 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어떤가.
김영현 : 아직은, 좋다. (웃음)
박상연 : 바로 그 쾌감 때문에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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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인터뷰. 최지은 five@
10 아시아 인터뷰. 김희주 기자 fifteen@
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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