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C";$title="";$txt="서재혁은 20년 넘는 세월을 베이스와 함께 했다.";$size="504,718,0";$no="2010060914595698202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 1994년 봄. 서재혁의 정신은 혼미했다. 수면 부족 탓이었다. 처음 잡은 일은 무척 고달팠다. 군 제대 뒤 바로 뛰어든 취업전선은 밴드. 베이스 연주가로 가수 최재훈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바쁜 일정 탓에 심신은 지쳐갔다. 하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앨범 작업을 끝내고 맞는 관중들의 환호가 청량제였다. 실력을 알아보는 업계의 시선도 일할 맛을 나게 했다. 입소문의 효과는 컸다. 최재훈 밴드 일을 하면서도 터보, 포지션 등의 앨범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연주는 항상 즐거웠다.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음악. 그 끈을 놓지 않은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의아한 점이 있었다. 노력한 만큼 대가가 따르지 않았다. 체불되는 임금. 주머니는 늘 허전했다. 오히려 방송, 행사 등의 일정만 많아져 매니저와 다투는 날이 잦아졌다.
“불이익을 당하면서까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재혁은 최재훈의 밴드를 과감하게 그만뒀다. 절이 싫어 중이 떠난 격이었다.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동료들은 한 명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음악계의 현실은 분명 잘못돼 있었다.
베이스를 틈틈이 연주하며 그는 다양한 경험을 체험했다. 공연 기획자, 뮤직비디오 프로듀서, 무대 연출가…. 모두 음악과 관련된 일들. 정신은 다시 혼미해졌다. 피곤함 탓은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순간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 했다."
한참동안의 생각 끝에 그는 알게 됐다. 자신이 계속 음악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의 겉돌기는 의미가 없는 듯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배가 고파도 무대에 오르면서 살겠다고.
이전 유명세 덕에 일은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다. 연주를 의뢰하는 업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아졌다. 국내 최고 음반기획사로 꼽혔던 도레미레코드사까지 손을 뻗을 정도였다.
승승장구에 서재혁의 어깨에는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거만해졌다. 혼자 음반을 제작해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인이던 김윤성과 함께 노래를 녹음하고 기획사를 돌아다녔다.
반응은 냉담했다. 손을 내민 기획사가 한 곳도 없었다. 둘은 결성도 못한 채 해체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윤성이 형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만큼 크게 실망했다. 그래도 의리는 있었다. 떠나는 공항에서 수고했다며 부활 오디션의 기회를 만들어줬다.”
사실 서재혁은 제안이 내키지 않았다. 록음악에 흥미가 없었고, 마약으로 얼룩진 이미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교적 나이 많은 멤버들도 껄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연주가로 사는 건 더 싫었다. 자신만의 음악색깔을 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어렵게 올려 든 수화기. 잠시 뒤 통화가 된 김태원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론리 나잇’과 ‘사랑할수록’ 연주를 준비해오세요.”
서재혁은 기분이 상했다. 록도 아닌 발라드로 오디션을 본다는 것이 불쾌했다. 짧은 순간의 치기였다. 곡을 카피하며 음악이 세련되고 수준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끊임없는 연습으로 손에 익힌 두 곡. 그러나 정작 오디션은 30초 만에 끝났다.
▶부활 서재혁의 스타일기 4회는 월드컵이 끝나는 7월 14일 오전 8시에 아시아경제신문 홈페이지(www.asiae.co.kr)서 계속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바랍니다.
$pos="C";$title="";$txt="서재혁이 상상밴드 데뷔를 앞두고 찍은 프로필 사진";$size="504,354,0";$no="2010060914595698202_2.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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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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