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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DNA] 당대 엘리트는 '이양구學派'로 뭉쳤다

재계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
<11>동양그룹 이양구 회장①


[아시아경제 황상욱 기자] 충정로 언덕 한 켠의 2층 단독주택. 서남 이양구 회장이 살았던 자택은 기업 총수의 집 치고는 작았다. 차고가 따로 없어서 담 옆에 차를 세워야 했을 정도였다. 응접실과 넓은 온돌 거실이 있었고 오래된 가구와 냉장고가 있었다. 보일러 시설이 돼있었지만 연탄을 땠다. 그 소박한 충정로 사택은 언제나 사람으로 북적였다. 루마니아 출신의 노벨상 수상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1916~1992년)가 지난 1974년 내한했을 때 이어령 교수와 도자기를 감상했던 곳도 그 집이다.


그곳이 바로 이른바 '이양구학파(李洋球學派)'의 본거지였다. 사업만큼이나 사람을 좋아한 서남은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강원용 목사, 강영훈 총리, 백영훈 박사, 이동원 장관, 박익수 교수, 조동필 교수, 이태성 교수, 이어령 교수, 이기택 교수, 이영호 장관 등이 이양구학파의 주축멤버였다. 학자, 목사, 고승, 예술가 등 분야도 다양했고 내로라하는 당대의 수재, 석학들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보니 그 면면이 화려하고 다양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지만 초기의 멤버들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엘리트들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즐겨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서남 자신이 공부를 많이 한 엘리트였기 때문도 아니었고 일가를 이룬 기업 총수였기 때문도 아니다. 일만큼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겼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큰 체구에 목소리가 허스키했던 서남은 웅변가였다. 특히 다양한 제스처를 사용하는 서남의 달변은 '드라마틱한 화술'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 충정로 자택, 국제학술원, 요리집을 옮겨 다니며 '이양구학파'는 열띤 토론과 시국담을 나눴다.

우리나라 경제건설의 산파역할을 했던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은 이양구 회장 추모집에서 이양구학파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젊은 엘리트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양구학파'라 하며 웃었지요. 이양구 회장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젊은 사람들을 키운 것이죠. 정치적 목적은 전혀 없었어요. 젊은이들과 교류를 나누고 토론하고, 그들이 하는 일이 좋은 결실을 맺도록 도와주셨죠."


이동원 교수가 개설한 국제학술원과 그곳에서 낸 우리나라 최초의 영자잡지를 발행, 강원용 목사가 주축이 돼 출범한 크리스챤 아카데미와 아카데미하우스의 설립을 비롯해, 백영훈 박사의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창설에도 서남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줬다. 무엇보다도 이양구학파의 주된 논쟁거리는 국가의 장래였다. 서남이 젊은 엘리트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그들을 도운 것은 그들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일해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독일원조였던 폴리시우스차관 도입에도 이양구학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젊은 '독일통'으로 불렸던 독일유학생 1호 백영훈 원장이 정부 측 부단장, 서남이 민간인 부단장으로 차관도입을 추진했다. 그 당시 폐허나 다름없었던 한국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독일차관을 추진하던 중에 서남이 아이디어를 냈다. 유람선 한 척을 전세 내 라인강에 띄우자는 것이었다.


서남은 자비를 들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양국의 재무부장관과 독일의 정, 재계 실력자들까지 100명 정원의 유람선에 가득 태웠다. 로렐라이까지 두 시간, 왕복 네 시간 동안 독일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당시 돈으로 배를 빌리는 데만 2만달러가 들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자비를 들여 선상파티를 연다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이 있다고 해서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일 이후 독일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결국 1964년 1억8000만마르크의 독일차관 도입이 성사됐다. 그 차관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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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욱 기자 o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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