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양 승 열(楊 昇 烈). 울산에서 성장하며 조그만 공단도시가 인구 100만 명의 광역시가 되는 과정을 보고 자랐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도심활성화를 주제로 도시계획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해안종합건축사사무소 소속으로 용산역세권개발 설계단에서 일하고 있다. "문명은 3가지 요소로 이뤄졌다. 진 truth 선 goodness 미 beauty 이는 곧, 과학 science 윤리 ethics 예술 art 이다. 이 모든 것은 일상 언어다"라는 말을 기억해 내고는 일상 언어로서의 건축에 관심을 두고 있다.
칸트의 산책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산책을 즐겼던 사람들은 사상가 장 자크 루소, 시인 아르튀르 랭보, 직업적 산책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작곡가 베토벤 등 나열하기 힘들 만큼 많다. 항상 제자들과 산책을 하며 대화를 통해 학문적 체계를 완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풍은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불리고 있으며,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한 뒤의 베토벤은 산책의 느낌을 표현한 ‘전원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이렇듯 산책을 즐겼던 이들은 걷는 동안 교감하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여 후세에 업적을 남겼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Konigsberg, 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그 도시를 떠나지 않고 80년을 살았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산책했던 일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대학 강사로서 강의를 마친 오후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산책길을 걸었으며, 그날의 철학적 사고를 정리했다고 한다. 조금은 단조로운 일과에서, 그의 산책은 서유럽 근세철학을 집대성하고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한 저서 ‘순수이성비판’을 탄생시키는 근간이 되었다. 흔히 철학은 칸트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말한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는 그는 다른 유수의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를 뿌리치고 스스로 초심자이자 배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유지하며 산책로를 걸었다. 칸트의 산책길은 겸손한 자세의 학자로서 그가 살아간 삶의 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삶의 길을 꿈꾸며
삶의 속도와 밀도는 공존하기 힘든 속성이 있다. 빠른 것을 요구하는 깍쟁이 사회는 ‘직립보행’이라는 인간의 특성을 줄여가며 속도의 경쟁을 유도해 왔다. 이렇게 속도가 경쟁력인 도시에서 칸트의 사색적 산책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저녁식사 후에 마실(마을의 방언, 이웃집에 놀러가는 것을 의미)가는 일은 옛날이야기이며, 사색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이도 적어졌다. 간혹 산책길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걷기보다는 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마음의 안녕을 찾기 위한 바람이 불고 있다. 몸의 건강을 위해 시작된 건전한 먹을거리 찾기가 정신적 웰빙(well-being)으로 옮겨간 것이다. ‘산책’의 의미를 다시 평가하여 진정한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최근 개인적 시간을 갖기 위해 제주도 ‘올레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콘크리트 일색인 도시에서 벗어나 일종의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길’을 꿈꾸며 비행기를 탄다.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바라보는 제주의 풍광은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일상에서 취할 수 있는 ‘삶의 길을 걷는다’기 보다는 바닷가 풍경과 개발되지 않은 옛 우리의 정취를 도보로 여행한다는 의미가 앞선다. 삶의 길을 추구하되 하나의 특별한 여정으로 남는 것이다. 굳이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여유로운 걷기가 가능한 곳이 있다.
정동길 1km
정동길은 고궁인 덕수궁과 한국의 근현대 건축물로 구성된 도시 공간이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덕수궁을 찾아가면, 대한문 옆의 돌담길에서 이 산책로는 시작된다. 높은 빌딩과 소음으로 점철된 도시 안에, 이렇게 조용하고 푸른 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정동 사거리를 중심으로 서쪽의 옛 돈의문(敦義門, 서대문)과 남쪽의 배재학당, 북쪽의 덕수초등학교로 통한다. 가로의 너비가 18m인데, 한 개 차선의 일방통행로가 구불구불하게 설치되어있어 자동차보다는 걷는 사람에게 좋은 길이 되었다.
정동 일대에는 사적지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이 많이 있다. 사거리 옆의 정동 교회는 고딕풍의 붉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건물이자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하여 지금에 이른다. 새로 지어진 오피스 건물의 공개공지를 배재학당 옆에 두어 빨간색 벽돌건물은 정동길의 오브제(objet)로 존재하게 되었다.
백년이 넘는 근대 건축물이 산재한 이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동극장은 1995년에 개관한 문화관광부 산하의 복합 공연장이다. 전통예술무대를 통한 한국의 전통 문화를 내·외국인에게 알리고 있으며, 최근까지 난타 전용극장을 운영하였다. 옛 가정법원 자리의 건물을 개보수하여 파사드(Facade, 전면부)만 그대로 보존한 채 지어진 서울 시립미술관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 중 하나가 되었다. 고풍스런 입면 내부는 깨끗한 현대식 전시공간이 운영되고 있다. 상설전시 외에 좋은 기획전시가 자주 열리는 곳이지만, 퇴근길 산책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미술관 앞에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돌담길을 연인이 같이 걸으면 곧 헤어진다는 이야기는 가정법원 덕분에 생긴 풍설(風說)이다.
지금은 도시가 광역화 되었지만,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서울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도시였다. 지도에 나타난 사대문의 위치를 통해 그 규모를 살펴보면, 동서남북 직선 4km 내외의 거리였다. 이 규모는 서울이 걷기에 딱 좋은 크기였음을 의미한다. 샛별 보이는 한양산책의 풍류를 어찌 알겠느냐만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그 멋을 대신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산책이란 오솔길이나 천변 길을 걷는 것이었겠지만, 천만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에 이런 곳을 꿈꾸기는 어렵다. 그래서 도심 속에 몇몇 남아있는 산책로는 우리의 보석이자 큰 축복인 것이다. 정동을 산책한다는 축복은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순한 걷기가 아닐 것이다. 열린 하늘과 계절에 나를 활짝 열어놓고, 숨을 가다듬으며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도시 산책의 즐거움
정동길을 산책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은 하늘이 보이는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머리에 이고 이곳을 걷고 나면 어느덧 맑아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낮은 건물과 그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나무들 위로 하늘이 언제나 보이기 때문이다. 도심의 한가운데서 정동은 서울의 허파인양 하늘을 향해 숨 쉬고 있다. 뉴욕시 맨해튼의 센트럴파크처럼 도시를 아우르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600년 도시의 역사와 서울의 근현대사가 녹아있는 우리의 소중한 장소인 것이다.
또한, 정동길은 도심지에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봄의 파릇함과 여름의 짙은 녹음, 그리고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아스라한 정경이 변화하는 곳이다. 계절마다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시에서의 산책이지만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에 미처 잊고 있던 걷기의 즐거움이 배어있다. 동행한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고, 마주 오는 사람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길이다. 정동길은 삶이 지루하고 힘겨울 때 가기 좋은 곳이다. 하늘을 가르는 바람으로 새로운 기운을 받고, 우리의 오랜 역사를 밞음으로 나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새천년하고도 10년이 되었다. 도시생활이 각박하다는 사람, 한가로움을 찾아 비행기를 타는 사람, 가슴속이 갑갑한 사람, 머리가 복잡한 사람, 모두가 주변의 산책길을 찾아가보자.편한 신발을 신고 차분히 내 딛는 발자국에 문제의 답과 삶의 즐거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 http://www.flickr.com
양승열 painter_e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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