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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떠나는 전라도 여행[19]

김용택의 새 색시 옥새 옷고름을 던져 놓은 것 같은 섬진강<4>

운암 댐 가에서
-가을에


작고 어여쁜 산봉우리들 사이로 지는 붉은 해와 붉은 햇살이 떨어지며 만드는, 해까지 가는 호수의 반짝이는 물길, 호수에 타는 몸을 던질 것 같은 절벽에 붉은 단풍나무들, 사람들이 사는 작은 마을로 가는 굽이굽이 좁은 길 가에 마른 잎을 달고 서 있는 작은 나무들, 나무를 감고 올라가다가 물든 칡잎, 잎 하나 없이 감 몇 개를 달고 있는 감나무, 낮은 산 아래 작은 마을 제일 뒷집 굴뚝에 저녁연기와 그 집 마당에 쌓인 곡식더미, 마을 앞 빈 논배미에 쌓인 짚더미들, 그 짚더미 사이에를 천천히 지나가는 나이든 농부와 고구마를 캐 간 빈 밭의 뒤집어진 흙, 아! 오래 된 마을의 오래 된 농부들의 느리고 더딘 몸짓, 오래전에 폐교 된 초등학교, 마을에서 뒷산 무덤으로 이어진 좁은 길가에 마른 풀잎들……을, 바라보는 그대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눈길을, 그러한- 것들을 쓸쓸이 보다. 아! 꿈길 같은 사랑이여! 작은 솔밭 사이, 어디로 난 길인지 모른 작은 오솔길을 걸어 다니다가…… 내 손 길 어딘가를 스치는 따사로운 가을빛이여! 내게 안겨오는 그대 얼굴을 찾을 때, 빛나는 가을 서정을 다 담은 그대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 쓸쓸하고도 달콤한 오래 된 사랑이여! 우물 같은 그대 눈이여! 어둠이 산에 내리다. 강에 내리다. 산그늘이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을 깊이 덮다.


꽃들을 따라다니며 시를 쓰다
-봄, 섬진강

땅에 쑥 돋아납니다. 해 뜨면 쑥 잎 끝에 보석 같은 이슬방울들이 반짝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자연은 무궁무진무구입니다. 우리들의 눈과 마음이 가 닿지 못한 무한대지요. 알 수 없습니다. 저 무궁무진, 다 보지 못하고 다 듣지 다 담지 못하지요.


아침에 본 쑥이 해질 때 보면 더 자라나 있습니다. 쑥은 봄기운을 가장 빨리 알아차린 풀입니다. 봄에 땅에서 돋아나는 것이 어디 쑥뿐이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풀들이 돋아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땅에 납작 엎드린 시루나물 꽃은 진보라색입니다. 마치 시루떡같이 꽃이 차곡차곡 피어 있어서 어머니는 이 꽃 창초 꽃을 시루나물 꽃이라고 불러줍니다. 이른 봄에 피는 풀꽃들 중에 까치꽃이 가장 선명한 꽃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꽃잎 둘레는 남색이고 속은 약간 흰색이지요. 얼른 눈에 띌 때 보면 마치 까치 몸 색깔 같아서 까치꽃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이 꽃의 학명은 개 불알 풀꽃 입니다. 키 작은 몸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꽃다지는 얼마나 앙증맞은지요. 냉이 꽃도 눈이 부십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울고 웃는 것 같은 저 풀꽃들이 어찌 꽃다지나 냉이 꽃 뿐 이겠습니까. 쭈그리고 앉아 작은 꽃들을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물 납니다. 정말 눈물이 솟지요. 어떻게 그 작은 몸으로 추운 겨울을 이기고 왔니? 하고 물어보면 대답이 없어 더 눈물 납니다. 조금 있으면, 아주 작은 벌레들의 나팔 같은 빨간 광대 살이 꽃도 핍니다.


봄에 피는 작은 풀꽃들은 추운 겨울 동안 자라나 죽은 듯 색깔을 잃고 지내다가 대지에 봄기운이 돌아오면 자기 색을 찾아내어 몸을 키우고 꽃을 피워냅니다. 봄에 땅에 달라붙어 피는 꽃들은 배고픈 시절에는 다 나물이었습니다. 그 작은 꽃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꽃은 봄맞이 꽃입니다. 봄맞이 꽃, 이름도 좋지요. 봄맞이꽃은 실 같이 가는 꽃대가 올라와 그 끝에 흰 꽃잎 네 장을 활짝 펼쳐 줍니다. 봄맞이꽃은 희고 눈부시어서 햇살 좋은 한낮에는 잘 보이지 않지요. 봄맞이꽃을 보고 걷다가 뒤돌아다보면 몇 송이가 새로 피어나 있습니다. 되돌아가 주저앉아 하나 둘 셋 넷 꽃잎을 세어 줍니다. 작고 예뻐서, 너무나 눈이 부시어서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온 몸이 시려옵니다.


봄에 핀 작은 풀꽃들은 그렇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흔적 같지요. 이른 봄 길, 나는 꽃들을 따라다니며, 이 작은 생명들 곁에 엎드려 시를 썼습니다. 아니,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이 꽃들이 나를 불러내게 이렇게 저렇게 시를 쓰라 일러주었지요. 나는 다만 그들의 말을 받아 적었을 뿐입니다. 봄이 되면 사람들이 눈을 들어 먼 산의 화려한 꽃을 찾는 동안 나는 이 작은 꽃들 앞에 절하듯 엎드립니다.



다시 섬진강
-다시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니


흐드러지게 핀 섬진강 매화 때문에 신문과 방송마다 야단이다. 그러나 지금 섬진강이 어떻게 죽어가고 섬진강변이 어떻게 파괴되어가고 있는지, 섬진강 모래밭이 어떻게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는지 보도하는 방송이나 신문은 없다. 강은 죽고 썩어 가는데 사람들은 매화타령이 한창이다.



섬진강을 따라가며 나는 차라리 강에서 고개를 돌린다. 때로는 강가에 앉아 엉엉 울고 싶다. 정말 가슴이 아프고 쓰리다. 수천 년 수만 년을 때론 굽이치고 때론 부서지며, 스스로 아름다운 길을 만들어가며 흘렀던 강물의 길을 사람들이 뜯어고치고 있다. 섬진강에서 가장 유장함을 자랑하는 곳에 다리를 놓느라 강물 속에 박은 교각과, 곳곳에 시멘트로 쌓은 강둑들은 강물의 속도를 바꾸어버려 몇 년 사이에 모래밭이 사라지고 앙상한 돌들이 드러난다. 돈이 되는 곳이면 물불 안 가리고 개발에 혈안이 된 저 탐욕이 무섭다.


강 언덕을 보라. 그 순박한 산등성이들을 까부수고 허물어 집을 짓는다. 강의 모양과 강물의 흐름은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는 축조물들이 흉물스럽게 곳곳에 들어서서 시정 넘치는 강변과 강물의 유장함을 죽였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관리하겠다는 종합적인 계획이 서 있는가. 세상을 뜯어고칠 힘을 가진 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국토를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유린하는가. 모두 제정신인가. 보존할 곳을 보존하는 것이 아름다운 개발인 줄을 왜들 모르고 강물 곳곳을 저렇게 자기들 맘대로 허물고 쌓는가.



강물이 죽고 썩으면 백 가지 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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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섬진강을 구경하러 다니는 모든 사람에게, 섬진강을 관리하는 모든 사람에게 울면서 호소한다. 강물이 죽어가고 썩어간다. 달빛 아래 눈부시던 백사장이 사라지고 자갈밭이 사라진다. 고기들이 강에서 떠나간다.


보아라, 인간들아!
강물이 죽고 썩으면 백 가지 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누가 썩은 강물을 따라가며 꽃을 볼 것인가.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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