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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조선 고종 때 서원이 당파싸움의 뿌리라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의 실체가 처음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경남 창녕의 사액서원인 관산서원 사당터에서 땅속에 묻힌 위패를 발견했다고 21일 밝혔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대원군은 서원철폐령(1868ㆍ1871년)을 내려 전국의 미사액ㆍ사액서원(약 1700여곳)을 47개소(사액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를 명했다.
이번 사액(1711년, 숙종37) 관산서원 사당터 조사에서는 온전히 확인된 매납시설을 통해 서원을 철폐하고 신주를 묻은 역사적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관산서원은 창녕에서 유일한 사액서원이자 영남5현(嶺南五賢, 김굉필ㆍ 정여창ㆍ이언적ㆍ이황ㆍ정구)의 한 분으로 숭앙(崇仰)된 영의정(추증) 문목공 (文穆公) 정구(鄭逑, 1543~1620년)를 기려 그가 사망하자 세운(1620년, 광해군12) 서원이다.
정구가 임지로 첫 부임한 창녕현감(1580~1581년)시절 관산재(冠山齋)를 비롯한 8개의 서당인 8서재(八書齋)를 세우는 등의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서고, 사망 당해에 바로 관산재 아래에 세워진 서원이어서 더욱 그 의의가 높은 곳이다.
이러한 서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발견된 매주(埋主)시설은, 철폐시킨 사당터 자리 한가운데를 파고 옹관처럼 옹기를 맞붙여 세워 그 속에 신주, 곧 정구의 위패를 봉안하고는 그 둘레에 사당에 얹은 기와로 3겹이나 감싸고 단단하게 흙으로 덮은 특이한 형식이다.
겹겹이 둘러싼 기와 사이에는 습기제거나 벽사용으로 보이는 숯덩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옹기 속에는 옻칠이 된 목제 위패 1점이 모셔져 있음이 비디오 내시경(Video-scope)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관계자는 "이번 창녕 관산서원 터에서 발견된 매주시설과 형식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첫 사례로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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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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