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먹세 그려/또 한 잔 먹세 그려/꽃 꺽어 산(算)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이어 매여 가나/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 예나/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 곧 가면/누른 해, 흰 달,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제야 뉘우친들 어이리」
조선시대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입니다. 일찍이 벼슬에 나서 온갖 풍파를 겪으며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많은 가사를 지은 송강이 적적한 시절 친구를 만나 ‘살아있을 때 마시고 즐기자’며 술을 권했다는 권주가입니다.
술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중국 이태백의 ‘장진주’도 압권입니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동해로 흘러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또 보지 못하였는가, 고당에 앉아 거울을 보며 탄식하는 모습을/아침에 검은 머리가 저녁에는 눈처럼 하얗게 변했구나/모름지기 인간의 일생은 마음 가는대로 즐기라는 것이니/술잔에 허무하게 달빛만 비추어서 되겠는가…」
이태백은 한때 궁정시인으로 있었으나 호탕한 성격 탓에 궁중에서 쫓겨나 유랑생활을 하며 벗들을 만나 ‘오직 술꾼만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며 ‘한 많고 근심 많은 세상을 그대들과 더불어 날려보자’고 노래했습니다.
술은 예부터 우리에게 무척 가까이 있었습니다. 풍류를 안다는 사람치고 술 한 잔 권하지 않고 술 한 잔 더불어 나누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술의 해독이 섬뜩하다 해도 유혹을 이기긴 쉽지 않았습니다. 어지럽고 어느 한 곳에 마음 둘 수 없는 어려운 시절 선비들은 술로 세월을 달랬고 신분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권하며 한 잔을 나누는 여유는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술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3000년은 넘었다고들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도 술의 신이 있습니다. 제우스와 인간 세멜레 사이서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술을 만들어 인간을 취하게 함으로써 기쁨을 주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로마신화에서는 박카스로 불리며 문명의 촉진자, 평화의 애호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육신은 그대로 있되 정신이 아득한 세상으로 나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어 당시 지중해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안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중국에서는 우왕 때 의적이 처음으로 술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고 하며 ‘하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하여 왕들은 술로 신을 공경하며 복의 근원이라고 칭송했답니다. 순왕은 술을 맛본 후 맛에 경탄하면서도 ‘장차 이것으로 인하여 망하는 자가 있으리라’고 경고 했습니다.
일찍이 술의 과유불급을 지적한 것입니다. 술은 적당히 먹으면 약이 되지만 과하면 독이 됩니다. 이는 개인에게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손실을 입힙니다. 유럽의 소문난 ‘술고래 국가’들이 술과의 전쟁을 선언했다는 소식입니다. ‘위스키의 고향’ 스코틀랜드에서는 정부가 유통되는 술의 최저가격을 정해 싼 값에 팔지 못하도록 했으며 판촉활동도 금지키로 했습니다. 영국은 이미 지난해부터 대중교통수단의 술 반입을 금지하고 술자동판매기도 철거하고 있답니다.
프랑스는 일정액을 내고 무제한 술을 마시는 ‘오픈 바’를 금지하고 술을 살 수 있는 나이도 18세로 올릴 예정이며 핀란드는 지난 1월 주류세를 10% 올려 술 소비를 줄이기로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과음으로 인한 질병과 사고로 사회적 비용도 크게 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술 소비량이 8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난 스코틀랜드의 경우 지난해 병원진료비와 기업 생산성 하락 등 술로 인해 지출된 사회적 비용이 우리 돈으로 약 4조9000억원을 넘어선다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과음도 심각한 실정입니다. 지난 한해 우리나라에서 소비된 소주는 34억8000만병으로 성인 1인당 91병씩을 마신 셈이며 맥주도 38억병을 소비해 1인당 100병이 넘습니다. 대학 입학철이 되면 매년 학생들이 술에 인해 고귀한 생명을 잃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올해도 인천과 강릉에서 술을 마신 후 숙소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대학에서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배포한 대학생활 안내책자에 소위 ‘폭탄주 제조법’을 게재했다니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급기야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나서 전국 348개 대학 총학생회장 앞으로 절주를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혹시 과음과 폭음을 그동안 억눌린 것을 풀기 위한 젊음의 통과의례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라고 질문하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출발점, 한창 꽃을 피워야 할 나이에 단지 술 때문에 어이없게 생명을 잃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고 호소했습니다. 복지부는 내년부터 전국의 모든 대학에 건전한 음주운동을 주도하는 절주동아리가 생길 수 있도록 동아리마다 300만원씩을 지원할 계획이랍니다.
‘계영배’란 술잔이 있습니다. 술을 잔의 70%정도 채우면 그대로 있되 가득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 없어지는 신기한 잔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들어졌다는 ‘의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거상 임상옥이 소유해 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으로 우리의 과음문화에도 계영배의 재등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실직고 하면 본인도 누구 못지않은 술꾼입니다. 가까운 벗과 만나 권주가 한 수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소담스러운 일이지만 모두들 어렵다는데 흔히 ‘코가 삐툴어지게 마시는 문화’는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경기침체로 비싼 술 소비는 줄고 막걸리가 인기랍니다. 퇴근길 그동안 못 보았던 친구들과 가벼운 한 잔은 어떨까요.
강현직 논설실장 jigk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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