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우먼톡]'왕의 여인'서 악녀로 그려진 고려시대의 무비(無比)

무비(無比)라는 것은 비교할 데가 없다는 뜻이다. 지혜라든가, 힘이라든가, 아니면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두 명의 무비가 나오는데 모두 여성이고, 그리고 아마도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두 무비 모두 왕의 사랑을 지극하게 받았으니 말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두 사람 모두 신분이 미천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무비는 고려 의종 대의 궁녀였다. 그녀는 의종의 총애를 받아 세 아들과 아홉 딸을 낳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그 자식들은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려는 아버지만큼이나 어머니의 신분이 중요했고, 왕의 자식이라 해도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다면 왕족이 되지 못했다. 의종의 정식 왕후는 장경왕후, 장선왕후였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이 적자였다. 무비의 자식은 아예 기록도 남지 못했다. 하지만 의종의 총애는 지극해서 무비의 자식들, 또 그와 결혼한 사위들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었다.

이 때문에 사회적 지탄을 받았는데, 무비는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나랏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비가 있건 없건 의종은 고려의 역사에서 손꼽히는 폭군이었다. 1170년, 차별당하고 무시당하던 무신들은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학살했고, 의종은 왕 자리에서 쫓겨나 거제도로 귀양 가게 된다. 무비는 도망쳤다가 붙잡혔는데, 무신들은 그녀도 죽이려 했지만, 의종의 어머니인 태후가 부탁해서 무비는 의종을 따라갔다. 이후 어떻게 됐ㅌ는지 알 수 없지만 불행했을 것이다. 의종은 자신의 신하였던 이의방에게 온몸의 뼈가 으스러져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뒤,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연못에 버려졌다. 그렇다면 이미 무비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빛나던 외모도, 왕의 총애도, 12명의 자식도 모두 잊혔다.

두 번째의 무비는 충렬왕 때의 사람이었다. 첫 번째의 무비가 그런 것처럼 천한 신분이었고, 그런데도 왕의 총애를 받았다. 문제는 상대가 원나라의 제국대장공주였다는 것이다. 충렬왕은 쿠빌라이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 홀도노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과 결혼했다. 정략결혼이었고, 충렬왕에게는 이미 고려사람 왕비 정화궁주가 있고 자식도 있었지만 제국대장공주가 정실이 되자 별궁으로 쫓겨나서 아예 왕을 만나지 못했다.

귀족이자 종실이었던 정화궁주마저 그랬지만 무비는 아니었다. 충렬왕은 무비를 지극히 사랑해서 도라산(都羅山)으로 갈 때마다 데리고 갔고, 그래서 무비의 별명이 도라산이 됐다. 원래 제국대장공주는 오만방자한 성격으로 잔치를 뒤엎거나, 사찰의 유물을 멋대로 가져가거나 심지어 남편을 때리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무비가 무사했던 걸까. 제국대장공주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공주의 아들이자 다음 왕인 충선왕은 "어머니가 병에 걸린 것은 너 때문이다"고 하며 무비를 죽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버지의 측근들 수십 명도 제거했다. 충렬왕은 충격을 받고 권력을 내려놓았고, 충선왕은 아버지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아름다운 과부를 바쳤고, 이것이 무비 기록의 끝이다.

역사 속의 두 사람의 무비는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녀들로 그려진다. 그럴 수도 있다. 천민이면서도 왕의 자식을 낳은 것부터가 사회의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것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무비는 끝내 자신들의 이름과 역할보다는 '왕의 여인'으로 남고 지워졌다. 빛나던 외모도, 지극한 총애도, 수많은 자식도 공고한 사회의 질서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었다. 역사의 바닥에는 이들처럼 기록되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가라앉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서글퍼진다.

이한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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