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고수열전]①유진기업 류득현…'연구소장 30년, 논문 170편' 기술맨

류득현 유진기업 기술연구소장…23세 입사, 28세에 기술연구소 소장
유진기업, 업계 1위 도약과 '최초' 수식어 붙게 만든 일등 공신
후배들에 "자기개발 계속, 분야 전문가 되고, 관련 인맥과 꾸준히 교류" 조언

편집자주우리 회사에 숨은 고수(高手)가 있다. 어떤 분야나 집단에서 기술이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고수’라고 칭한다. 중소·중견기업에는 드러나지 않은 숨은 고수가 많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실력을 발휘한 고수가 회사를 성장시킨다. 중소기업을 지키고 있는 진정한 고수들의 스토리를 전달한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레미콘 업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업계 '최고수(最高手)' 류득현 유진기업 기술연구소장(전무)은 "아무리 뛰어난 기술자라도 현장을 모르면 답을 알 수가 없다"면서, 자신의 좌우명을 묻는 말에 내놓은 답이다.

류득현 유진기업 기술연구소장이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유진기업]

'우문현답(愚問賢答)'은 본래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한다'는 뜻이다. 지난 6일 유진기업에서 만난 류 소장은 "사무실과 실험실에서는 기술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레미콘 배치 플랜트(제조설비)에 가서 레미콘이 제조되는 공정과 출하실(운전실)에 가서 실제 레미콘 제조기술을 배워야 한다"면서 일할 때는 '우문현답'의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류 소장은 수도권 신도시 개발 열풍이 한창이던 1989년 23세 나이로 유진기업 인천레미콘 공장에 입사했다. 당시 유진기업은 설립 5년 된 작은 회사였고, 레미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전국적으로 레미콘 공장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하던 때였다.

레미콘 업계는 콘크리트 지식을 가진 기술자가 필요했고, 학교에서 콘크리트를 다루는 건축공학이나 토목공학 관련 전공자들이 주로 입사했다. 인하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예정자였던 류 소장은 지역 기업인 유진기업 인천레미콘 공장에 취직했다.

막상 입사하고 보니 회사는 생각보다 열악했다고 한다. 레미콘회사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바닥이었고, 함께 일하며 어깨를 부딪치는 건설·시멘트회사 직원들도 레미콘회사 직원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류 소장은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회사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제품을 만들어서 사정하면서 제품을 구매하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레미콘 품질 신경도 안 쓰던 시대에 '기술연구소' 출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 유진기업 서서울 공장 3층에 자리를 잡은 유진기업 기술연구소. [사진=유진기업]

레미콘은 굳지 않은 상태의 콘크리트를 말하는데, 건설 현장에 도착해 건물 형태를 만드는 거푸집에 붓기 전까지의 상태다. 품질관리 담당인 그는 제 성능을 내도록 하기 위해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많은 준비가 필요한 까다로운 제품인 만큼 출하 전후 최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매번 현장에서 꼼꼼하게 챙기면서 기술연구소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를 회사에 건의했고, 그의 열정을 높이 산 회사는 1994년 기술연구소를 만들면서 입사 5년 차에 불과한 그를 소장으로 앉혔다. 당시는 레미콘은 만들기만 해도 팔리는 시대로 경쟁사와 제품 품질경쟁을 펼치는 시대는 아니었다. 류 소장은 "레미콘에 대한 품질개선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미콘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개발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다"면서 "동종 업계에서는 호기심 반, 부러움 반으로 지켜봤지만, 레미콘 산업의 미래를 생각할 때 당시 우리는 절박했다"고 말했다.

1993년 유진기업 인천공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맨 오른쪽이 류득현 소장(전무)이다. [사진=류득현 소장]

기술연구소 출범은 유진기업이 후발주자로 레미콘 업계에 뛰어들었음에도 업계 1위로 도약하는 디딤돌이 됐고, 류 소장이 기술연구소 선장을 맡은 것은 1위를 유지하는 계기가 됐다.

레미콘 품질 고도화와 신제품 개발을 향한 기술연구소의 목표는 그를 학구파로 만들었다.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깨닫고 배움의 길에 도전, 6년간 주경야독하며 석·박사 학위를 땄다. 기술연구소 차원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을 모았고, 산학 연계를 통해 신기술을 섭렵했다.

170편의 논문, 그리고 '최초' 수식어 붙는 유진기업 만들다

그렇게 유진기업을 업계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 기업으로 만들었다. 1997년 국내 최초로 기존에 없었던 저발열 콘크리트(시멘트가 굳으면서 발생하는 열이 적은 콘크리트)를 개발해 상용화했고, 2005년에는 국내 최초로 콘크리트기술 백과사전을 편찬했다. 이 사전은 각 사업장에 비치돼 콘크리트 품질 담당 직원뿐만 아니라 전 직원들의 콘크리트 제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은 물론, 콘크리트 업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일본식 용어를 순우리말로 정리해 주목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저탄소 콘크리트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으며, 2018년에는 국내 최초로 레미콘공장에 스마트팩토리 설비를 도입했다. 경쟁사에서 150㎫(메가 파스칼)의 초고강도 콘크리트 제조 기술을 개발할 때 유진기업은 200㎫ 이상의 초고강도 콘크리트 개발에 돌입하는 등 늘 한발 앞서나갔다.

2010년 저탄소 콘크리트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이후 유진기업 기술연구소 직원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사진=유진기업]

그 과정에서 170여편의 논문을 한국콘크리트학회와 대한건축학회 등에 발표했다. 30여년간 1년에 5~6편의 논문을 쓸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그의 논문은 수많은 학자와 기술자들이 인용했다. 2008년 대한건축학회지회연합회에 발표한 '순환 굵은 골재 흡수율에 따른 RC보의 휨 성능에 대한 실험적 연구'와 2011년 한국콘크리트학회 학술대회에 발표한 '플라이애시 화학성분에 따른 플라이애시 기반 무기결합재의 기초적 물성' 등 10여편의 논문은 인용 빈도가 최소 10회 이상일 정도로 업계와 학회에 미친 영향도 컸다.

책도 썼다. 2013년에 발간한 '레디믹스트 콘크리트 품질 문제의 원인 및 대책'은 레미콘품질관리위원회와 한국콘크리트학회의 공동 저술이지만 류 소장이 주저자였다. 이 책은 콘크리트 공사 중에 발생할 수 있는 품질 문제의 원인과 그 대책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그 해결책을 제시한 콘크리트 실무지침서로, 콘크리트 업계의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국가 공인 콘크리트 ·레미콘 '최고수(最高手)의 길'을 가다

콘크리트 압축강도 실험체와 실험장비가 놓여 있는 유진기업 서서울공장 레미콘 품질관리실. 기술연구소 아래층이다. [사진=유진기업]

류 소장은 자신의 성장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로 김무한 충남대학교 교수를 꼽는다. 그는 "교수님은 국내 대학에 콘크리트 전공이 없던 시절에 일본 홋카이도대학에 유학을 다녀와 충남대에서 후학을 양성하셨던 분이며, 국내 최초의 콘크리트 전문가이자, 국내 콘크리트 산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레미콘회사에 근무하면서 콘크리트에서 발생하는 품질 문제, 배합설계, 건설회사에서 클레임이 접수됐을 때 김 교수를 찾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류 소장은 "과거에는 콘크리트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대부분 현장에서 경력이 많은 기술자의 직감이나 경험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교수님은 다양한 환경에서의 이론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콘크리트 기술자들에게는 신세계였고, 개안이었다. 업계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면서 김 교수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30년간 기술연구소를 이끌며 그가 쌓아온 경력은 화려하다. 인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콘크리트 및 시멘트 전문위원회 위원,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기술평가위원,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건설 신기술 심사위원,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연구개발 평가위원,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기술평가위원을 맡고 있다. 거기다 한국콘크리트학회 부회장, 한국건축시공학회 부회장, 한국골재산업연구원 품질검사 심의위원도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산업자원부장관 표창, 국토교통부장관 표창,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국가 공인 콘크리트 ·레미콘 최고수라 할만하다.

유진기업 기술연구소 직원들은 "정말 부드럽고 자상하지만, 업무엔 꼼꼼하고 빈틈없는 분"이라고 그를 평했다.

류득현 유진기업 기술연구소장이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유진기업]

류 소장은 "평소 직원들을 대할 때 성실함과 책임감은 강조하지만, 단점은 보지 않고 지적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그는 "구조물 문제 등 근본적 문제는 꼭 짚어야 하지만, 현장에서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단점을 지적해 구성원 간 갈등을 유발할 이유가 없다. 되도록 장점을 부각하면 조직은 더 단단해진다"고 말했다.

후배 직장인들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계발을 계속해서 한 분야에서만큼은 전문가가 돼야 한다"면서 "연관된 분야에 관련 인맥들과는 꾸준히 교류하라"고 조언했다. 류 소장 본인의 삶 자체가 귀감이 되는 조언이다.

레미콘 업계 "2차 제품 생산 능력이 미래 좌우" 경고

레미콘 업계에는 "2차 제품 생산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 소장은 "시간이 갈수록 현장에서 타설하는 콘크리트는 줄어들고, 공장에서 미리 만든 안전한 2차 제품으로 시공하는 곳이 늘어날 것"이라면서 "PC(Precast Concrete)의 필요성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 유진기업 서서울 공장. [사진=유진기업]

PC는 사전 제작 콘크리트다. 최근 건설사들은 모듈러주택 건설에 이어, 건물의 기둥, 보, 벽체 등을 미리 만들어서 현장에 가져와 조립하는 PC 공법을 선호한다. 공장에서 이미 안전 검증이 끝났고, 환경적으로도 부하가 적으며, 공기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미콘 업계는 생존을 위해 2차 제품 생산능력 향상 등 미래먹거리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류 소장의 일침이다.

전방산업인 건설업계와 시멘트업계에 대해서는 '존중의 자세'를 요청했다. 그는 "서로의 영역에 대해 인정하는 문화가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류 소장은 "레미콘에 대해서는 레미콘사가 가장 잘 안다. 그런데 건설사 등이 ‘협의’를 벗어난 ‘지시’가 되는 것은 문제"라면서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또 그 영역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고수의 한마디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한다’는 뜻인데, 레미콘 업계에서는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라고 해석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자라도 현장을 모르면 답을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기술연구소 직원들에게 사무실과 실험실에서는 기술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레미콘 배치 플랜트(제조설비)에 가서 레미콘이 제조되는 공정과 출하실(운전실)에 가서 실제 레미콘 제조기술을 배우라고 권한다. 그런 기술이 숙달되어야 제품 불량도 없고, 현장에서 요구하는 고품질의 레미콘을 생산할 수 있다. 그리고 레미콘이 최종 타설되는 건설 현장에 가서 실제 레미콘이 타설되고, 콘크리트 구조물이 건설되는 과정, 레미콘이 굳으면서 강도가 발현된 이후 제품에 하자는 없는지도 확인하라고 요구한다. 이론과 실무가 겸비되지 않으면 절대 훌륭한 기술자가 될 수 없다.

바이오중기벤처부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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