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해영기자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으로 인한 지정학적 균열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기축통화로서 달러와 유로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
미국 달러화에 이어, 대표적 글로벌 기축통화로 꼽히는 유로화의 입지가 점차 불안해지고 있다. 미중 경쟁 속에 달러와 위안화의 위상이 커지는 반면, 유로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24년 전 달러를 위협할 경쟁 기축통화를 꿈꾸며 본격 발행이 됐지만 유럽연합(EU) 내의 정치·경제적 불안과 중국의 부상, 여전히 강력한 달러의 위상 등으로 인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23일 세계 은행간 송금망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지난달 유로의 국제 결제통화 비중은 31.7%를 기록했다. 1위인 달러 다음으로 높지만 그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국제 결제통화 시장에서 유로 비중은 2013년 37.5%, 2018년 34.3%에서 올해 31%대로 하락했다(4월 기준). 같은 기간 달러 비중은 35.6%, 39.2%에서 지난달 42.7%로 상승세다. 이로 인한 달러와 유로의 결제 비중 차이도 10년 전 1.9%포인트에서 현재 11%포인트로 확대됐다.
글로벌 외환보유액 비중으로 봐도 유로는 달러에 한참 못 미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세계 각국의 외환보유액 중 통화별 구성 비중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유로는 20.5%로 달러(58.4%)의 3분의 1에 그친다. 외환거래 시장에서도 유로의 비중은 달러에 크게 못미친다. 라가르드 ECB 총재도 기축통화로서 유로의 지위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지난달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 행사에서 "국제무역에서 중국 위안, 인도 루피화 사용이 증가하고, 외환보유고에서 대체자산으로 금 보유고가 늘어나고 있다"며 "몇몇 국가들이 달러와 유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EU의 공식 화폐로 1999년 1월1일 출범한 유로가 달러를 대체하지 못하는 배경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 외에도 유럽의 정치·경제적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
2010년 전후로 유럽의 경제상황이 악화되며 기축통화로서 한계는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유럽의 부채위기, EU를 이끌던 독일·프랑스의 리더십 약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회원국 간 불균형과 갈등 등이 걸림돌이 됐다. 남유럽과 북·서유럽 간 빈부 격차가 커지고, EU가 엄격한 재정준칙을 강조하면서 정부 부채비율이 높은 남유럽 국가가 독자적인 재정 정책을 펴기 어려워진 부분은 회원국 간 정치적 갈등을 키우기도 했다. 통화당국 입장에선 역내 경제적 불균형이 큰 상황에서 금리를 조금만 올려도 부채가 많은 남유럽 국가를 침체에 빠뜨릴 수 있어 운신의 폭도 좁아지게 됐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변동성도 유럽 경제의 리스크로 자리잡았다.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 위안의 부상도 유로에 위협이 됐다. 중국은 개도국과의 국제무역에서 위안 결제를 확대하고, 달러로 이뤄지는 원유 결제 시장에서도 위안 거래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중국의 ‘페트로 위안’의 비중이 커지면서 위안 결제 비중은 2013년 0.69%, 2018년 1.66%에서 올해 4월 2.29%로 점차 확대되고 있다.
아드리안 슈트 네덜란드 라드바우드대학교 행정학 교수는 "유로존 지역의 경제력 감소를 고려하면 유로화의 글로벌 역할 증대는 제한적"이라며 "20년이 넘는 기간 (외환보유액에서) 거의 변화가 없는 유로 비중과 다른 통화의 비중 확대는 유로의 상승 여력이 거의 없음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유로 영향력 확대가 과연 실익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슈트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주요한 글로벌 지정학적 경쟁은 미·중 사이에서 일어난다"며 "EU가 미국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유로화의 역할 확대를 열망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과의 협력 강화에 집중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유로화는 통화가치 안정성에 있어서도 여전히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변동성이 크다는 뜻이다. 지난해의 경우 달러 패권을 쥔 미국이 고강도 긴축에 나서자, 유로화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유로화는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지난해 고강도 긴축에 나서자 '패리티(1유로=1달러)' 환율 아래로 떨어지는 등 20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 19일(현지시간) 유로화 가치는 국제 외환시장에서 1유로당 1.0802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해 8월22일 1유로당 0.9941달러로 20년 만에 패리티가 붕괴되고, 9월28일 0.9535달러로 최저점을 찍은 이후로 13.3%나 오른 것이다.
올해 유로화가 지난해 수난을 털고 강세를 이어갈지, 약세로 전환할지 시장의 전망은 엇갈린다. 대체적으로 시장은 유로의 강세를 점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달러 가치는 내리고 유로 가치는 오를 것으로 봤다. 현재 달러는 적정가치 대비 5~15% 높은 반면 유로는 적정가치 대비 8% 저평가 됐다는 게 골드만삭스의 분석이다. 유로존 경기 회복세가 견조하고, 물가가 여전히 높아 당분간 ECB의 금리인상 기조가 이어질 것이란 점도 유로 상승 요인 중 하나다. 아문디자산운용은 올해 유로 가치가 1.18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유로 강세가 조만간 꺼질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Fed가 긴축 종료 스텝을 밟더라도 연내 금리인하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에서다. 로베르토 미알리치 유니크레딧 포렉스 스트래티지스트는 "연내 Fed의 금리인하는 없을 것이란 우리의 시나리오에 시장이 점점 수렴하고 있다"며 "이는 내년 2분기까지 달러의 평가절하를 늦출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유로 가치는 올해 1.1달러를 넘어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