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K-우먼]“공동체 일원으로서 당연히 할 일… 내가 믿는 것에 최선”

SF작가·번역가·공익변호사·공익사업가 등으로 활약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구조적 차별에 천착

편집자주아시아경제는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을 '파워 K-우먼'으로 선정해 오는 10월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2023 여성리더스포럼’을 통해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들은 성별·인종·장애·가난 등 장벽에 굴하지 않고 경계를 부수거나 뛰어넘어 새롭고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한 여성 리더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친 세상에 위로를 주고, 누군가의 롤모델로 자리 잡아 공동체가 나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차별에 위축되거나 경계에 갇히지 않고 맞서 싸운 사람들을 파워 K-우먼 후보로 뽑아 매주 소개합니다.

과학소설(SF) ‘우주류’(2005)는 어려서부터 우주비행사의 꿈을 가졌던 주인공이 40살이 되기까지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작가인 정소연 법률사무소 보다 대표변호사(40)는 “소설을 쓸 때 되게 멀게 느꼈는데 지금 그 나이가 됐다. 소설처럼 어떤 큰 전환점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는 살던 대로 한 살씩 더 먹고, 앞으로도 이렇게 가겠구나 싶다”고 말했다.

모든 활동의 종착지는 언제나 '사람'

전환점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SF작가·번역가·공익변호사·공익사업가 등 다양한 수식어가 그에게 따라 붙었다. 서로 다른 분야를 종횡무진해 오면서도 모든 활동의 종착지는 언제나 ‘사람’을 향했다.

정 변호사는 어린 시절을 경남 마산에서 보냈다. 원래 꿈은 천문학자였다. 아득히 넓은 우주에 막연한 동경을 품고, 과학교양서를 읽으려 서점을 서성였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 철학을 전공하던 중, SF소설 번역을 맡게 됐다. 번역을 거듭할수록 직접 하고픈 이야기가 생겼다. 온라인에 익명으로 올린 글을 웹툰 작가가 만화화한 ‘우주류’로 2005년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에서 가작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이듬해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에선 소설 ‘마산앞바다’로 가작을 받았다. 지난 2월 일본에선 여러 지면에 쓴 칼럼과 수필, 해석을 모아서 펴낸 ‘세계의 악당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법’ 일본어판이 공개됐다. 정 변호사는 일본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내달 도쿄로 떠난다.

SF소설의 소재는 어디서 오는지 물었다. 그는 “과학지식 이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먼저 생각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도 바뀌지 않는 것을 발견할 때 영감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누군가와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 내가 (원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지 돌아본다. 가족 안에서도 사랑과 갈등, 희생이 있다”는 것이다. 중심 관계를 정하면, 이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설정을 씌운다. 그렇게 엄마와 딸, 언니와 동생, 장애인과 비장애인 파트너들의 이야기가 그의 SF소설에 담겼다.

‘사람간 관계’에 몰두하게 된 배경엔 직접 느낀 구조적 차별이 있다. 정 변호사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알게 된다.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성적과 관계 없이 같은 반 여학생 절반은 여자 상업고등학교에 가게 되는 상황을 바라보던 중학생 때, ‘여자는 왜 실력이 있어도 쉽게 집안살림이나 해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SF 소설가, 번역가이기도 한 법무법인 '보다' 대표 정소연 변호사.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수도권 고등학교에 전학가서 겪은 ‘따돌림’ 경험도 지금의 정 변호사를 만든 요인 중 하나다. 동급생들은 전학과 동시에 전교 1등을 한 지방 출신 전학생을 못마땅해 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라면서 맨날 울었어요. 그런데 수개월간 아무도 인사해주지 않던 교실에서 하루는 한 친구가 ‘소연아 안녕’이라고 해줬어요. 너무 고마워서 저는 또 울었죠. 그 인사는 제가 한참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됐습니다.”

사람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닿는 일 고민하다 로스쿨행

그런 감동으로 ‘사람’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싶었다. 과거 본인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글쓰기를 넘어, 사람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닿는 일을 고민했다. 그렇게 로스쿨로 향했다.

제1회 변호사시험(2012)에 합격하고 ‘공익변호’를 시작했다. 외국인들도 발음이 쉬운 ‘보다’란 이름으로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변호사 등으로 활동하며 각계각층의 ‘소외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왔다.

정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항상 (모든 부분에서)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본래 다면적이고, 실수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다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한 측면에서 구현될 수 있는 정의가 있다. (이 같은 정의들이 모여) 그렇게 우리 사회가 크게 나아갈 방향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작지만, 공동체 일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만큼은 (참여)해야 된다고 본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계속 시험을 해야 한다”며 “어차피 누구든지 항상 용기를 내고 계속 다른 사람 앞에서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저는 그런 영웅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고, 힘에 부쳐 물러나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7년부턴 장학사업 ‘보다 이니셔티브’를 통해 가난한 외국 소녀들의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캄보디아 대학 초청 강연 과정에서, 열악한 환경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 한 지방의 여학생들을 알게 됐다. 어린 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압박받고 있었다. “모든 선택이 ‘진짜 선택’은 아니잖아요. 선택지엔 제한이 있고, 상황이 어려울수록 선택지의 폭은 좁아져요. 조금만 끌어주면 보다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러면 내가 (대학에) 보내겠다”고 했다. 캄보디아에서 장학생 4명을 뽑아 대학에 입학시킨 것을 시작으로 그는 베트남과 네팔 등 여학생 수십명의 대학 입학을 지원해왔다. 장학사업은 모두 정 변호사 사비로 운영한다. 책이 부족한 현지 도서관엔 한국 중고서점에서 영어책을 잔뜩 사 보내기도 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믿고 헌신했던 일을 지금까지 놓지 않고 관여한 결과, 지금의 나를 이런 식으로 만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제가 위원을 맡고 있는 한국 이주여성인권센터의 행사에서 한 외국인이 ‘선생님 아니세요?’하고 다가왔어요. 로스쿨을 다닐 때 한국어교사 봉사활동을 하며 만났던 분이었어요. 그때의 봉사활동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에서 한 일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나는 20대 때 상상하지 않았던 일을 하며 살고 있네요.”

과거의 자신, 또는 지금의 20대 여성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했다. 정 변호사가 말했다. “어떻게 살지 모르니까, 지금 내가 믿는 것에 최선을 다해!”

▶정소연 변호사는

1983년생인 정 변호사는 서울대에서 사회복지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2005년 스토리를 맡은 만화 ‘우주류’를 통해 SF작가로 데뷔했다. SF 단편집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백만 광년의 고독’ ‘아빠의 우주여행’ 등에 작품이 실렸다. ‘미지에서 묻고 경계에서 답하다’(공저), ‘옆집의 영희 씨’ ‘이사’ ‘세계의 악당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법’ 등을 썼다. 2012년 제1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같은 해 법률사무소 보다를 개업했다.

사회부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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