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기자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홍제동 개미마을은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최근엔 마을 곳곳을 물들인 벽화들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 /문호남 기자 munonam@
마을 곳곳의 지붕엔 어느새 성큼 다가온 가을을 맞이하는 빨간 고추가 널려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골목 사이 고개를 내민 해바라기를 연신 흔들면 바로 옆집 빨랫줄에 걸린 이불들도 덩달아 펄럭이기 시작합니다. 이곳에서만 34년째 살고 있다는 아주머니는 사는 게 조금 불편해서 그렇지 이곳만큼 집값 싼 곳이 없어 행복했노라 지난날을 회상합니다.그러고 보니 골목 사이 집집마다 놓인 LPG 가스통이 눈에 띕니다. 마을의 시작이 1960년대부터 들어선 무허가 판자촌이었던 탓에 토지 소유문제가 얽혀 아직도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네요. 축대 옆 계단과 쪽 길의 폭이 채 1m도 안 되는 곳이 많아 담벼락 틈 LPG통과 연탄아궁이가 맞붙은 곳은 한눈에도 위험천만해 보이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위험을 감수하고 생활한다고 하십니다.2014년 기준 개미마을의 주민등록 등재인구는 169세대 315명, 이중 노인층은 128명인데 주민의 절반 이상이 세입자로 조사됐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땀 흘리는 제가 짠했는지 집에서 냉수 한 컵 떠다 주신 김 할머니는 올해로 이곳서 생활하신 지 50년이 됐다고 하십니다. 3남매가 북적이며 생활했던 집에 이젠 할머니만 홀로 남아계시는데, 계단이 워낙 가파르다 보니 세월에 장사 없는지 욱신대는 무릎 부여잡고 병원 가는 날 외엔 바깥 외출은 엄두도 못 내신다고 합니다.개미마을 곳곳을 수놓은 벽화들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진돗개 벽화. 해맑게 웃는 진돗개의 모습에 보는 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사진 = 문호남 기자 munonam@
개미마을의 사랑방, 전주슈퍼는 아직 한낮인데도 분위기가 왁자합니다. 개미마을 30년 지기 이웃이라는 중년 아저씨 세 분이 모여앉아 잘 익은 총각김치에 막걸리 한 잔씩을 기울이고 계셨는데요. 원래 이곳 별명이 ‘인디언촌’이었다고 귀띔해주십니다. “60년대 마을 처음 생기고 나섬부턴 하루 천막 지어놓으면 바로 또 다음날 철거하고, 간밤에 또 간신히 천막 올려 놓으니께 며칠 뒤에 또 철거하고. 허구헌날 천막이 들어서니 인디언 천막 같다 해서 인디언촌이라 불렀제” 그러자 옆에 앉은 아저씨가 한마디 거드십니다. “그도 그렇고, 옛날에 이후락이가 북에 가서 김일성 만나고 와서 남북 뭐 성명인지 했잖어. 그때 북에서 방문단이 내려 오는디 여기 천막촌이 봬주기 추하다 이거제. 그때 서울 시장이 아래쪽 천막촌을 싹 다 철거해블고, 뭐 만날 철거해놔도 사는 사람은 달개들고 또 천막 올리고 하니 그 모습이 꼭 서부 인디언 같다 이거 였제”한국전쟁 후 밀려 내려온 사람, 도시 올라가 돈 벌어 오겠다며 고향 떠난 사람들이 모여 판잣집을 짓기 시작한 게 벌써 1950년대 후반부터라고 하니, 개미마을의 역사는 벌써 70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인왕중학교를 기점으로 개미마을 맨 첫 집에 사시는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부여에서 올라와 이곳에 맨 처음 터를 잡으셨다고 하시네요. 그러자 문득 그 이전의 개미마을 모습이 궁금해졌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지금 마을이 들어선 곳엔 큰 채석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할아버지가 사시는 마을 첫 집 자리엔 채석장에서 쓰는 공구와 기계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하고요.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 /문호남 기자 munonam@
그러고 보니 개미마을 바로 옆 문화촌현대아파트 단지 내에는 큰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진 공간이 있습니다. 1942년 6월 18일 자 조선총독부 관보 부록에 실린 현지보고 기사를 살펴보면 과거 이곳의 다른 풍경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제정의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려 오른쪽으로 꺾어 야채밭을 반천 남짓 나아가면 경성부 홍제정 산 1번지 조선총독부 착암공양성소가 있다. 소화 13년(1938년) 8월 1일 개설된 광산전사의 연성도장이다.”일본은 홍제동 인왕산 자락의 암벽을 무참히 유린했습니다. 공기착암기, 전기착암기를 다루는 착암공 실습교육장으로 이곳을 쓴 것도 모자라 1936년엔 발파연구소를 설립해 앞에선 폭약으로 암반을 깨고, 뒤에선 착암기로 그 속을 파고드니 제아무리 바위산이었대도 온전했을 리 없지요. 할아버지네 집은 그 착암공들의 장비를 보관하는 보관소 터였던 셈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높은 아파트와 개미마을 곳곳의 집들이 들어차 과거의 생채기는 시야에서 사라져 역사의 흔적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 /문호남 기자 munonam@
나란히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를 자처했던 중계동 백사마을과 성북동 정릉골이 정비사업에 돌입하면서 개미마을에도 한때 재개발 바람이 불어 닥쳤지만, 2009년 제1종일반주거지역으로 용도가 변경돼 4층 이하 저층 개발만 가능해지면서 사업은 불발되고 마을은 그 자리에 멈춰 서버렸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의 발걸음을 끌어당기는 풍경 이면에는 개발할 수 없는 여건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 주민들의 자포자기한 생활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