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냉장고 사용 설명서/윤성학

  박화자 여사가 꽃무늬 냉장고를 새로 샀다
  우리 집은 음식점이었다 식당에 딸린 방에서 나는 자랐다 주방 냉장고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면 어선을 타고 멀리 나가 엄마가 좋아하는 임연수어를 잡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침이면 도매상 아저씨들이 두부와 당면 다꾸앙과 어묵 같은 식자재를 자전거에 싣고 와 부렸고 아버지는 그것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를 여닫으며 하루가 가고 저녁 장사가 끝날 즈음 도매상들은 수금 장부를 들고 다시 왔다 그자들이 엄마와 실랑이하는 게 보기 싫어서 세상의 모든 수금쟁이들이 다 죽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공터에서 뛰어놀다가 들어와서는 냉장고부터 열었고 환타를 꺼내 단숨에 마셔 버리곤 했다 나는 어느샌가 냉장고만큼 키가 자라 있었다  엄마의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일흔이 넘은 엄마의 냉장고 아직 먹을 만하다 마흔이 넘도록 나는 엄마를 열고 엄마를 꺼내 먹는다 소금에 절여진 엄마를 구워 먹었고 엄마의 뼈를 들통에 넣고 고아 마셨다 아버지는 이제 냉장고를 채우지 못하는데 나는 환타를 꺼내듯 엄마를 꺼내 먹는다  자다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면 거실에 나와 냉장고에 기대앉는다 원양어선 엔진의 진동이 등에 전해지면 다시 잠들 수 있다 두 여자가 나를 열고 나를 꺼내 먹는다 이 냉장고에 채울 것들을 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가야 한다 이제 침대로 가서 자야 하는데 나는 자꾸만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오늘은 바깥 날씨보다 냉장고 안이 더 따뜻하다는 대한(大寒)이다 한밤중이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가 왜 자꾸 냉장고를 새로 사야겠다고 그랬는지 정말 몰랐다. 이제는 자식들도 다 따로 나와 사는데, 두 분이서 드셔 봤자 아침저녁 오물오물 자시면서, 하다못해 자랑할 사람도 따로 없으면서 왜 좀 더 큰 냉장고를 사야겠다고 볼 때마다 그랬는지 말이다. 이제는 안다. 엄마네 집에 문득 가 보면 안다. 엄마는 자꾸 냉장고 문을 연다. 냉동고에 얼려 두었던 곶감도 꺼내고 젓갈도 꺼내고 고기도 꺼낸다.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무국을 끓이면서 두유도 하나 꺼내 주고 사과도 한 알 꺼내 깎아 준다. 유통기한이 좀 지난 꽁꽁 언 초코파이도 꼭꼭 씹어 먹으면 괜찮다고 그러면서.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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