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집현전 학사들의 휴가지, 진관사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아시아경제]'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어느 명상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절에 살면서도 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도심의 절에 살면서 그 증세가 심해졌다. 살고있는 절은 근무지요 남의 절에서 머무는 템플스테이는 휴가지인 까닭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일하러 남의 절에 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일하면서 동시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뜻하지 않는 휴가가 된다. 이런 것을 일러 금상첨화라고 하는 모양이다. 밤 9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해야 할 몫을 대충 마쳤다.여장을 풀고서 창문을 밀쳐 밖을 내다보니 가로등 불빛만이 마당에 가득하다. 성삼문(1418~1456)이 집현전 학사시절 세종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 유급의 독서휴가)의 명을 받고 이 절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위로는 반짝이는 별빛이 부딪히고(上磨明星熒) 아래로는 넓은 평야의 풍성함을 굽어보네(下瞰周原)'라는 시를 남겼다. 그 자리는 어디일까. 고려 때 왕실의 골육상쟁으로 피신한 대량군(大良君)을 진관(津寬)대사가 숨겨 주었다. 대량군은 뒷날 왕위에 올랐고 역사는 현종(992~1031)으로 기록했다. 이후 왕실의 후원으로 이름조차 제대로 없던 토굴절(穴寺, 굴을 판 후 입구는 지붕삼아 섶으로 얼기설기 덮어 겨우 비바람이나 피하던 움막같은 절)은 제대로 규모를 갖추었고 그 인연으로 절이름도 진관사(津寬寺)로 바뀌었다. 이후 조선의 건국과 왕권을 다지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왕실주관의 수륙재도 이 절에서 치렀다. 또 집현전 학사 십여 명이 단체로 휴가를 받아 글을 읽으려 올 만큼 명성과 사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진관사는 임진란과 6.25를 거치며 다시 토굴로 바뀌었다. 휴전 후 십년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은 진관사(津寬寺) 자리에 젊은 비구니 진관(眞觀)스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비록 한문글자는 달랐지만 옛 진관스님과 현 진관스님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현 진관스님은 50년동안 이 가람을 가꾸었다. 어찌 환생이란 것이 따로 있겠는가. 작년 열반하실 무렵 장마철도 아닌데 큰비가 며칠동안 쉬지도 않고 계속 내린 기억까지 새롭다. 그 유지를 제자들이 한 치도 빈틈없이 잘 이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이튿날 수륙사(水陸祠)가 있던 자리로 갔다. 주춧돌과 몇 점의 유구가 남아있다. 언덕줄기에 올라서니 처마가 겹겹이 이어진 사찰전경이 삼각산 숲과 잘 어우러져 한 눈에 들어온다. 동구 밖에는 한옥마을이 보이고 그 뒤로 평야가 점점이 펼쳐진다. '넓은 평야의 풍성함을 굽어본다'는 성삼문의 글로 미루어 보건데 왕실행사 담당부서가 있던 이 자리의 객실에서 묵었던 모양이다. 함께 온 박팽년(1417~1456)은 '논마다 가득 채워진 물이 한강보다 더 넓고 많아 보인다'는 찬탄으로 글벗의 흥을 더욱 돋우었다. 서림진관사(西林津寬寺) 서쪽의 진관사로 숲을 삼았고남압한강호(南壓漢江滸) 남쪽의 한강을 논물로써 눌렀다.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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