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블로그]헌법재판소의 기억

[아시아경제 김민진 기자] 언제 누가 꽂아 놓았는지 모를 태극기는 시도 때도 없이 펄럭였다. 방한 목도리와 장갑, 방한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여맨 노파는 동틀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한 자리를 지켰다. 변론이 있는 날은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탄핵심판일이 다가오자 기자회견을 빙자한 집회ㆍ시위는 늘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은 하루 종일 귓전을 때렸다.지나가는 행인들과의 악다구니는 예사였다. 노란리본이라도 눈에 띄면 욕설과 저주는 배로 쏟아졌다. 아들뻘 되는 장년도, 손녀뻘 되는 학생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훈계가 이어졌다.방송 카메라는 화풀이 대상이었다. 이들에게 언론은 허위ㆍ편파보도를 일삼는 공적이었다. 기자들은 '불쌍한 대통령님'을 괴롭히는 몹쓸 종자였다. 그에 비례해 경찰 숫자도 늘어났다. '남의 집 귀한 자식' 의경들도 때론 분풀이 대상이 됐다. 지난 주말 대학 선배의 상갓집에서 20여년 만에 마주친 후배도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경이 된 그가 형광 옷을 입고, 무전기를 들고 헌법재판소 앞을 서성거렸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후배와 나는 같은 자리에서 '헌법과 법률을 중대하게 위반한, 헌법수호의 의지가 없는' 대통령이 파면되는 현장을 지켜봤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은 그렇게 물러갔다.지난 주말 가족들과 다시 헌법재판소 앞을 지났다. 꽃나무는 봄을 틔웠다. 한복 입은 청춘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거리는 북적였다. 한 달 남짓 시간이 흐른 헌법재판소 주변 풍경은 생경하기만 했다. 역사적 심판이 행해진 그 터는 근ㆍ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지녔다. 연암 박지원을 거쳐 손자 박규수는 평생 이곳에서 자주적 개국을 꿈꿨다. 개화사상의 선구자는 개항기 격랑에 휩싸인 조국을 애통하게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주인은 수시로 바뀌었다. 새 집주인이 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은 망명 생활 중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이 터를 사들인 박규수의 제자 홍영식은 갑신정변 실패 후 대역죄로 처형됐다. 몰수된 집은 잠깐 병원(광혜원)이 됐지만 다시 새주인을 맞았다. 툇마루에서 백송(白松)을 바라봤을 대감은 역적으로 죽임을 당했고, 터는 매국노의 손에 넘어갔다. 이후 병원, 기숙사, 학교 등으로 쓰이던 곳에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은 건 지금부터 29년 전이다. 바뀌지 않은 건 집 터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600년 백송뿐이었다. '비선실세' 최순실과 권력을 나눴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번 주 18개의 죄목을 안고 재판에 넘겨졌다. 청와대로 금의환향했을 때도, 최순실에게 연설문과 외교문서를 넘겨줄 때도, 대기업 총수들을 독대하거나 참 나쁜 사람들이라며 공무원들을 찍어낼 때도, 국민들을 향해 세 번이나 담화를 읽어 내려갈 때도 몇 달 후 자신의 운명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많은 기업들은 면죄부를 받았다. 우병우는 불구속 기소되면서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절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워줬다.박 전 대통령이 구속 기소된 날, 대통령 선거 경쟁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누군가의 퇴장은 새로운 등장을 의미했다. 역사는 생몰(生沒)을 반복하며 이어지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김민진 기자 enter@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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