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대 역수출하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

브로드웨이 캐스트로 영어 공연…무대 조명 의상 등 업그레이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브래들리가 '지금 이 순간'을 열창하고 있다.

[아시아경제 (대구)=조민서 기자]'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컬 넘버를 고르라면 단연 '지금 이 순간'이다. 하이라이트 부분에서의 폭발적인 고음부가 핵심이다. 노래 잘 한다는 가수라면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한 번쯤 불러보는 곡이다.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 던지고, 남은 건 이제 승리 뿐"이라는 가사와 어울리지 않게 결혼식 축가로도 많이 불린다. 광고나 예능에서도 종종 인용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이 노래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곡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더군다나 주인공 지킬이 자신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기 직전에 부른 노래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적다. '지금 이 순간'을 터닝포인트로 지킬은 이중인격이자 '악'의 상징, 하이드로 변신한다. 많은 관객들이 이 한 장면을 라이브로 보기 위해 '지킬 앤 하이드' 공연장을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7일 대구 달서구 계명아트센터를 찾은 관객들은 색다른 '지금 이 순간'을 맞보았다. 지킬 역을 맡은 브래들리 딘(47)이 '디스 이즈 더 모먼트(This is the moment)'라고 노래를 시작하자 객석이 숨을 죽였다. 인기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57)이 1990년에 만든 이 노래를 원어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막힘없이 시원하게 뽑아내는 고음에 박수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5개월에 걸쳐 진행된 오디션에서도 브래들리 딘은 노래 솜씨 하나로 제작진들의 만장일치를 얻어냈다. 무엇보다 그는 이 노래의 파급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무대에 가만히 서서 객석의 반응을 살폈다. 관객들이 더 열렬히 호응하자 입가의 웃음을 애써 감추지도 않았다. 마치 잠깐 동안 그의 콘서트에 온 느낌이었다.공연 전 진행된 간담회에서 딘은 "몇 년 전 브로드웨이에서 같이 분장실을 쓴 한 배우가 '한국 관객들이 최고'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을 하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연기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큰 사랑과 지지를 받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무대 위에서 그의 감격에 겨운 표정이 연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배우를 하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역할인데, 할 때마다 2~3㎏이 빠지는 느낌"이라며 "내 영혼 속에 정원을 두 개 만들고, 지킬과 하이드라는 캐릭터를 각각 심어서 그것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국내에서 '지킬 앤 하이드' 흥행의 견인차 역할을 한 배우 조승우(37)에 대해서는 "캐스팅이 된 뒤 유튜브에서 찾아봤는데 아주 훌륭했다. 초반에 정적이고 차분하게 캐릭터를 표현하는 모습을 참고했다"고 했다. 조승우의 '지킬'이 섬세하고 예민하다면, 딘의 '지킬'은 과감하고 스펙터클하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한 장면.

사실 '지킬 앤 하이드'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인기있는 작품은 아니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원작소설(1866)의 매력에 빠져 여러 차례 무대에 올리려다 번번이 실패했다. 1980년에 작품을 기획해 브로드웨이에 입성하기까지 17년이나 걸렸지만 흥행작의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그러다 2004년 한국 초연에서 그야말로 '초대박'이 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조승우, 류정한, 홍광호, 김소현, 김선영 등 스타캐스팅이 적중했고 한국 정서에 맞게 일부 설정을 바꾼 것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킬 앤 하이드'는 뮤지컬 팬들이 치열한 예매 전쟁을 해야만 티켓을 구할 수 있는 메가 히트작이 됐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제작사 오디컴퍼니는 다시 이 작품으로 해외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일종의 '역수출'인 셈이다. 브로드웨이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영어 공연을 하는 것도 그러한 노력 가운데 일부다. 신춘수(48) 오디컴퍼니 대표는 "'지킬 앤 하이드'는 기존의 작품을 새롭게 선보이는 첫 사례다. 한국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공략하면 해외진출에도 유리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무대와 조명, 의상도 새롭게 바꾸고, 한국 관객들의 정서에 맞지 않아 삭제한 부분도 다시 살렸다. 은유적으로 표현해온 자막은 보다 정확하고 직설적으로 고쳤다. 지킬을 짝사랑하는 클럽 무용수 '루시'의 밑바닥 삶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대사와 안무가 보다 과감해졌다. 1부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도 달라진 무대 모습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지킬이 '지금 이 순간'을 부르자 무대 뒤 배경이 순식간에 유리병 1800여개로 가득 찬 실험실로 변한다. 빨갛고 파란 유리병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면서 장관을 이룬다. '루시' 역의 다이애나 디가모(30)는 "지금 공연하는 버전은 1885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충실하면서도 요즘의 관객들이 뭘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디테일이 훌륭하다"고 했다.인간의 양면성을 다룬 보편적인 주제와 비극적인 로맨스,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음악, 브로드웨이 실력파 배우들과 앙상블(코러스팀), 스케일이 커진 무대 등 흥행요소는 두루 갖췄다. 신 대표는 조승우 등 한국 배우들의 인상이 강한 점을 우려해 "비교하지 말고 새로운 작품으로 봐 달라"며 "배우에 대한 편견없이 온전히 작품 자체만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지난 1일 대구에서 첫 선을 보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전국 아홉개 도시에서 공연한 뒤 싱가포르와 마카오 등 동남아 지역으로 진출한다. 이와 별도로 내년에는 중국에서 현지 배우들의 공연도 진행된다. 신 대표는 그동안 '할러 이프 야 히어 미(Holler if ya hear me)'나 '닥터 지바고'를 통해서 꾸준히 브로드웨이의 문을 두드려왔지만 쉽지 않았다. 이 경험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와 상업성을 다 갖추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깨달았다. 여전히 그의 최종목표는 뮤지컬 본고장인 영국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 진출이다. 내년 3월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선보이는 서울 공연은 각국의 뮤지컬 프로모터들에게 평가받는 중요한 자리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작품 '지킬 앤 하이드'로 다시 승부수를 띄우려고 한다. 현재까지 대구 관객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이 꽉 찼다. 커튼콜에서 기립 박수가 나왔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터닝포인트가 지금 이 순간 시작되고 있다.대구=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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